8월 22일자 동아일보에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의 인터뷰가 실렸다. 동아일보는 “손학규-문재인식 야권통합 수용 못해, 의석 몇 개 주고 진보정당 죽이겠다는 것”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내용이야 별 게 없지만, 동아일보는 민주당이 최근 천명한 야권통합 김 빼기로 인터뷰를 활용했다. 그렇다면 이정희 대표의 인터뷰 목적은 뭐였을까? 딱히 짚이
자본의 마케팅 전략 가운데 ‘네이밍(이름짓기)’이라는 것이 있다. 자본은 이를 브랜드 파워를 키우는 핵심전략으로 삼고 있다. 자본은 얄미울 정도로 치밀하다. 국내에는 네이밍 전문회사만 30~40개에 이른다고 하고, 최고경영자(CEO)들이 일일이 챙길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시장성(대중성), 기억성, 차별성을 좋은 이름 짓기의 요소로 꼽는다. 이 기준에 비춰본다면 노동운동의 네이밍은 빵점이다.
치사한 토론방식 중 하나가 논리나 가치대신 도무지 외워지지 않는 숫자나 통계를 늘어놓는 것이다. 수학은 따질 여지없는 확실한 결론을 내놓는 학문이고, 숫자로 설명된 말은 어딘가 설득력을 얻는다. 거짓말도 숫자를 통하면 진실처럼 보일 때가 있다. 때문에 언론은 숫자를 좋아한다. 노동운동은 그야말로 간절하게 기자회견을 열지만, 언론은 당신의 주장 말고 숫자를
2008년 유엔의 미래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은 남성성을 결정하는 Y염색체가 점점 작아진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내놨다. 심지어 일부 제약회사에서는 남성들이 여성들에 비해 떨어지는 감성적이며 정교하고 창의적인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약을 개발 중에 있다고도 한다. 그에 앞선 2007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는 가계의 소비활동에
드디어 이집트 대통령 무바라크가 쫓겨났다. 한 장의 사진이 그가 어떤 인물인지 말해준다. 이집트 국영신문 ‘알아람’은 지난해 미국과 정상회담에서 무바라크를 돋보이게 만들려고 사진을 조작했다. 사진은 그 탄생 이래 사실을 그대로 담아내는 직설적인 매체로 공인돼왔지만, 발달된 기술은 사진을 권력지배의 수단으로 만들었다. 미국 대통령 링컨의
주광성 곤충이 빛을 쫓듯 권력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거의 맹목적이다. 1월11일 일본 출장에 나선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일본을) 한참 배워야 한다”고 한마디 하자, 다음날 거의 모든 언론은 그 싱거운 말을 일제히 제목으로 뽑아 보도했다. 이틀 후에는 이건희 회장이 자신의 칠순 만찬장에서 사장들에게 나눠준 와인에 대한 기사가 나가기도
폭력은 본래 그들의 존재방식이다. 마르크스와 더불어 사회과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막스 베버는 “국가란 정당한 혹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폭력수단에 기초를 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고 말했다. 트로츠키 역시 “모든 국가는 폭력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민주주의 현대국가에 적용하는 것은 억지라고 할 이들이
막연한 이념과 분명한 욕망 한구사회여론연구소의 유권자 이념성향 조사에 따르면 2004년 이후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답한 유권자들의 수가 보수적이라는 답보다 줄곧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엔 진보51.5% 대 보수39.6%로 11.9%의 큰 격차를 나타냈다. 그럼에도 무려 500만 표 이상의 차이로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킨 것이 명백한 우리 현실이다. 아
국가체제는 기억력조차 당파적이고 정치적이다. 진보와 보수는 역사교과서를 놓고 지속적인 논쟁 중에 있으며, 정부 덕에 국민이 산다는 교훈을 가르치고픈 정부는 지난 28일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서울수복을 기념한다며 서울 한 복판에서 대대적인 전쟁행사를 열었다. 언론과 미디어의 기억력 역시 당파적이다. 한국전쟁은 이 즐겨 기억하는 과거이며,
자중지란이란 내분을 말한다. 병법에 따르면 자중지란이면 필패라고 했다. 갈라치기란 바둑에서 상대의 세를 분산시키기 위해 상대진영의 한 가운데 놓은 포석을 말한다. 이간질? 설명이 필요 없겠다. 이는 모두 공격의 명분이 약하고 정면승부가 어렵다 싶으면 꺼내는 카드다. 지난 7/22일 사내하청 불법파견 판결에 대한 보수언론의 태도가 바로 그러했다. 판결 직후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