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구사회여론연구소의 유권자 이념성향 조사에 따르면 2004년 이후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답한 유권자들의 수가 보수적이라는 답보다 줄곧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엔 진보51.5% 대 보수39.6%로 11.9%의 큰 격차를 나타냈다. 그럼에도 무려 500만 표 이상의 차이로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킨 것이 명백한 우리 현실이다. 아마도 ‘막연한 이념적 지향’과 ‘분명한 현실적 욕망’이 낳은 모순이리라. 이는 이타적인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현실에선 재빠르게 배금주의에 순응하는 종교인들의 태도와도 닮았다. 이 모순적인 인구는 2005년 현재 우리나라 인구의 53.5%를 차지하고 있다.

이념의 대중적 혼돈 속에 최근 정치권에도 이념에 대한 혼란이 나타나고 있다. 한 때 북의 권력구조를 두고 벌인 ‘레알 진보’ 논쟁도 관심거리였지만, 그 반대편인 보수진영의 논쟁도 꽤 흥미롭다. 포문을 연 사람은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이다. 그는 한나라당 당대표 출마를 선언하며 ‘진짜 보수론’을 제기했다. 그는 “병역과 납세의무를 안 지키면서 국가안보를 말하는 보수, 계파싸움에 날 새면서 화합을 말하는 보수, 국민에게 막말하면서 대통령 앞에서 작아지는 보수는 가짜보수”고 자신이 “진짜보수”라고 했다. 보수도 때론 우리끼리라며 무조건 싸고돌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냉철한 것은 아니다. 보수논쟁은 우리 사회가 이념에 대해 얼마나 기준이 없고 정통성이 없는지 알려줄 뿐이다.

진짜 보수와 가짜 보수

유명 경제평론가이자 자칭 보수인 최용식 21세기경제학연구소장은 ‘민족’을 보수의 최상위 개념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보수의 지상과제는 통일이고 국가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성조기나 흔드는 자들은 가짜 보수라고 역설한다. 그리곤 진짜 보수란 국가의 헌법을 수호하고 국가의 주권을 위해 민주화투쟁을 한 이들이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보수의 주류와는 매우 거리가 먼 주장이다. 보수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공정’이란 화두를 MB에게 조언한 사람은 진짜보수를 자처한 이문열이란 얘기도 있다. 중앙은 7월 21일자 칼럼, ‘리빠똥은 가라’에서 MB정권 실세들을 ‘똥파리’를 뒤집은 단어인 ‘리빠똥’이라 칭하며, 가짜보수와 이권만 쫓는 ‘똥파리 보수’를 척결하고 “진짜보수들이 대연합을 해야 정권을 재창출할까 말까”라며 논쟁에 끼어들었다.

아리송한 보수를 찾는다면 한나라당 국민소통위원회는 세계적인 학자이자 신자유주의 비판가인 장하준 교수를 초청해 강연까지 들었다. 그 자리에서 장 교수는 “세계 최초로 복지국가를 수립한 이는 독일의 보수정치가 비스마르크였다”며 “듣기 거북하겠지만, 사회복지를 통해 사회통합을 하는 게 현 시스템을 지키는 것이고 진짜 보수”라고 말했다. 현재 보수진영은 막연하나마 진보로 기우는 국민정서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를 놓고 목하 고민 중이다. 보수논쟁은 마침내 한나라당이 ‘개혁적 중도보수’라는 이념지향을 공개선언하기에 이르렀고, 보다 못한 조선일보(11/2)는 “시대착오적 한나라당에 대해 주류보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분노했다. 한편, 경향신문 김철웅 논설실장은 “한국사회의 순항을 막는 건 제대로 된 보수세력의 부재 탓”이라며 한나라당을 보수정당으로 규정하는 어법에 의문을 제기한다. 주장의 결은 다르지만 두 신문은 한나라당을 제대로 된 보수정당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다.

보수는 없다. 진보는?

한나라당은 중도네 복지네 하며 요란을 떨었지만, 결국 얄팍한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중산층을 끌어안겠다는 한나라당의 첫 신호였던 ‘부자감세 중단정책’은 말 꺼내기가 무섭게 폐기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한나라당이다. 대표적 보수논객인 전운책 변호사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 사업을 위해서, 자기 가족의 영화를 위해서 보수가 된 부류들을 굳이 말하자면 ‘한국적 보수’ ‘이권 보수’라고” 규정한다. 한마디로 한나라당은 정통보수가 아닌 이권과 권력을 쫓는 기득권 집단이라는 얘기다. 결국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보수는 없다. 이념이 혼란스럽기는 진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으니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잣대이다. 내친김에 들어보자. 전운책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유일한 잣대는 ‘대북 문제’이며, 진보도 반북하면 보수고 보수도 친북하면 진보가 되는 웃기는 세상”이라고 한다. 웃기지는 않지만 흘려버릴 수 없는 지적이다. 바야흐로 보수와 진보에 대한 이념혼란이 무성한 시절이다. 보수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진보도 왠지 자신의 이념을 펼쳐 보이기에 주저주저 한다. 아무래도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다.

박성식 / 민주노총 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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