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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형 안의 진실과 예술 혹은 조작[삐딱한 신문 읽기] 사진이 말하는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박성식  |  edit@ilabo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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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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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집트 대통령 무바라크가 쫓겨났다. 한 장의 사진이 그가 어떤 인물인지 말해준다. 이집트 국영신문 <알 아람>은 지난해 미국과 정상회담에서 무바라크를 돋보이게 만들려고 사진을 조작했다. 사진은 그 탄생 이래 사실을 그대로 담아내는 직설적인 매체로 공인돼왔지만, 발달된 기술은 사진을 권력지배의 수단으로 만들었다.

   

미국 대통령 링컨의 사진사였던 매튜 브래디가 “카메라는 역사의 눈”이라고 말할 만큼 사진은 사실을 기록해왔다. 한편, 뉴욕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한 전시회가 ‘사진의 민주주의’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유는 “사진은 다른 매체와 달리 아마추어들도 특별한 기술 없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사진에서 우연 혹은 운이 차지하는 역할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보도에서도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기사는 몰라도 사진을 의심하는 독자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사진은 진실의 틀이었고 저널리즘의 요체였다. 그러나 이도 점점 옛말이 돼가고 있다. 소위 ‘뽀샵질’이 유행인 요즘 사진이 사실과 멀어지는 사례도 있다.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도 사진조작은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도 있다. 회화는 작가가 누구인가가 위작 논란의 중심이 되는 반면, 틀림없는 사실이라 여기는 보도사진은 사진의 사실여부가 논란의 대상이 된다.

   
▲ <어느 공화국 병사의 죽음> 로버트 카파.

과거 주요한 보도사진조작 방식은 바로 ‘연출’이다. 세계최고의 종군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가 남긴 <어느 공화국 병사의 죽음>은 연출 논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스페인내전에서 한 병사가 총알을 맞아 죽는 순간을  담았다고 알려진 이 사진은 연출된 것이고, 이 병사가 이후에 살아있는 사진도 나왔다고 한다.

   
▲ <이오지마 섬의 국기 게양> 조 로젠탈.

 

   
▲ <독일 국회의사당 위에 나부끼는 붉은 깃발> 예프게니 칼데이.

조 로젠탈의 <이오지마 섬의 국기 게양>이나 예프게니 칼데이의 <독일 국회의사당 위에 나부끼는 붉은 깃발>도 연출된 사진이라고 한다. 물론 ‘연출을 조작이라고 볼 것인가’란 논란이 있지만, 오래된 유명 사진 중 몇몇은 아예 사진 자체를 조작한 것도 있다.

   
▲ 왼쪽 원본사진, 오른쪽 괴벨스를 지운 사진.

스탈린은 레닌의 곁에 서있는 트로츠키를 지웠고 히틀러는 자기 옆의 괴벨스를 지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사례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근 조선일보 사진이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연평도 포격의 충격을 높이기 위해 포연의 색감을 조작했다고 한다.

   
▲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부각하기 위해 원본사진의 포연을 진하게 조작한 <조선일보> 보도사진.

사실 이런 직접적인 조작은 유치한 방식이다. 요즘은 사진에 직접 손을 대기보다 사실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실을 호도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조선, 중앙, 동아일보는 몇 백만명의 평화로운 행렬대신 극소수의 흥분한 사람들과 창문이 부서진 경찰차를 찍은 사진으로 대중에게 촛불항쟁을 기억시킨다.

   
▲ <경향신문>의 유럽노동자 파업 보도사진.

또 지난해 유럽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를 전하는 사진 편집도 진보와 보수논조의 언론이 묘한 대조를 보인다. 로이터나 AP 등 해외통신사들이 타전한 사진 가운데 동아일보는 뭔가 과격하고 불안한 느낌의 시위사진을 선택해 보도했고, 경향은 축제느낌이 물씬 담긴 사진을 선택했다. 이 사진들을 통해 대중은 각기 저항을 위험한 것 혹은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 <조선일보>의 유럽노동자 파업 보도사진.

갖가지 논란과 문제가 있지만 여전히 사진은 백 마디 말보다 더 명확하게 역사와 진실을 전하는 매체로 평가할만하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형벌 중의 하나가 ‘능지처참’이라고도 불리는 ‘능지형’인데, 사람의 신체를 자르고 살점을 수백조각으로 도려내는 형벌이다.

   
▲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 작자미상, 1905년.

이 끔찍한 형벌을 담아낸 한 장의 사진은 인간과 권력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깨닫게 한다. 중국에서 전해진 능지형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기록이 보이고 광해군, 연산군 때 많았다가 1894년 고종 때에 이르러 금지됐다고 한다.

잔악한 역사를 고발하는 사진기록은 적지 않다. 그 중 로렌스 바이틀러의 사진은 유별나다. 이 사진은 고발사진이 아니라 기념사진이다. 사진 속의 남녀노소 백인들은 잔혹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즐거운 듯 기념사진을 찍었다. 게다가 이들은 그런 사진을 기념엽서로 만들어 대량유포 했다. 이러한 사진들은 편견이 낳은 야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사진은 의도하지 않은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 <흑인을 불에 태워 죽인 후 기념사진을 찍은 백인들>,1919년.

보도사진이 가장 관심을 갖는 사진은 전쟁사진이다. 최고 권위의 퓰리처상 수상작 다수도 전쟁사진이다. 전쟁사진들은 렌즈를 통해 전쟁을 고발하고 평화를 갈구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비밀은 있다. 우리는 강대국 언론이 보내주는 사진을 통해 아프리카나 동유럽, 중동의 전쟁사진, 특히 전쟁에 희생당한 아이들을 종종 본다. 사진들은 그 곳에서 벌어지는 잔인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 할 고통에 대해 말해준다.

   
▲ <린치당한 토마스 쉽(Thomas Shipp)과 아브람 스미스(Abram Smith)> 로렌스 바이틀러, 1930년.

한편으로 이런 사진들은 우리에게 편견을 은밀히 주입한다. 저토록 잔혹한 행위는 아프리카와 같은 가난한 나라의 속성이라는 듯, 즉 폭력과 야만은 가난의 부산물이며 가난한자들은 어리석다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미국의 유명한 예술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미국은 미국이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악에 대해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즉, 미국은 타국의 무질서와 야만을 고발하고 개선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미국사회는 휴머니즘과 민주주의의 사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본 흑인노예 학살 사진은 미국 문명의 감춰진 폭력성을 증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인 대통령까지 등장한 미국의 그 어느 곳에도 ‘흑인노예사 박물관’은 없다고 한다.

사진이 사실을 전한다는 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이제 사진을 무심코 보지 말자. 그 사각형 안에는 진실과 예술도 있지만 거짓과 조작, 은밀한 계산도 있다.

박성식/ 민주노총 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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