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이들이 자라서 덜하지만, 둘 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우리 부부도 육아는 전쟁이었다. 결혼한 지 3개월, 3년이 고비라고, 그 고비만 넘기면 괜찮아진다고 누가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떠들었나.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15년이 된 지금도 싸운다. 그것도 치열하게. 하루하루가 고비고 하루하루가 위기다. 좀 달라진 게 있다면 아이들이 좀 어릴 때는 부부싸움의 99%는 “누가 아이를 돌볼 것이냐”의 문제로 일어난 일이었다면 지금은 레퍼토리가 좀 다양해진 정도? 당시 “육아는 엄마 몫이다”를 주장하기 위해 남편이 즐겨 ‘인용’하던 이야
정신없이 바쁜 엄마, 아빠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래도 보육에 대한 큰 걱정 없이 키울 수 있었던 바탕은 오롯이 지역에 있는 어린이집이었다.두 아이 모두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을 만 1세부터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꽉꽉 채워 다녔다. 두 아이 모두 ‘장기근속(?)’자에게만 준다는 감사장을 받았다. 그 덕에 나는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을 졸업할 때 학부모 대표로 인사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지난해에 지리산으로 귀농을 하신 원감 선생님 집으로 가족 모두 놀러 다녀오기도 했다. 큰아이는 선생님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작은 아이
어릴 적 세 들어 살던 주인집의 둘째 딸과 함께 과외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시험을 보면 그 친구와 늘 점수 차이가 크게 났다. 안 그래도 셋방살이에 주눅 들었던 나는 공부 실력이 크게 차이가 나니 더욱 주눅 들어 살았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외화벌이 노동자인 아빠 대신 홀로 우리 남매를 키우던 엄마 기를 살려드리게 보란 듯이 공부라도 잘했어야 하는데.어느 날 주인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엄마가 일을 다녀서 미야가 공부를 못하는 것 같아.”“그러게. 엄마가 있어야 하는데.”나는 이상했다. 나는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