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3.8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여성조합원들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여성 노동자의 삶과 노동현장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더 평등한 노동현장을 만들기 위해 함께 투쟁하겠습니다.

한국KDK지회 사무실에 들어서자 “찾아와 고맙다”라며 삶은 계란과 귤을 건냈다. “호박식혜도 만들어오려고 했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라며 아쉬워했다. 금속노조를 귀하게 생각하고 맞아주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엄마로서, 노동자로서 긴 세월을 산 신금자 조합원을 소개한다.

KDK에서 어떻게 일을 시작했나요?

한국KDK에서 일하는 신금자라고 해요. KDK는 냉장고나 컴퓨터,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파워코드를 만들어요. 저는 사출 찍어내는 완성품 몰딩 작업을 하고 있어요. KDK는 우여곡절도 많고, 명도 참 긴 회사예요. 제가 일 시작할 때 서울 구로공단에서 꽤 큰 회사였는데,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안양과 충주로 공장이 내려왔어요. 저는 의료기기 만드는 안양공장에 갔는데, 그것도 잘 안됐러요. 해고될 상황이었는데, 노동조합 덕에 충주공장으로 와서 정년을 앞두고 있어요.

KDK 들어오기 전 대기업에 잠깐 다녔는데, 빨간 날에 놀지 않더라고요. 딱 한 달만 일하고, 소개받아서 여기로 옮겼어요. 여기는 빨간 날 다 쉬고, 아침 6시에 출근해서 오후 2시에 퇴근하고, 오후 2시에 들어가서 밤 10시에 퇴근하니까, 좋더라고요. 애가 어렸으니까 애 키우기 좋겠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거죠. 보너스도 다른 데보다 많았어요. 처음에는 전세 얻을 때까지만 있어야지 했는데, 전세 얻고 나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집 사야지, 그러다 보니 벌써 35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1988년에 입사해서, 올해가 정년이에요.

모두를 위한 희생의 기억

노동조합은 언제 처음 접했나요?

26살쯤 취업하고 몇 개월 뒤에 사이렌 소리 같은 게 울렸어요. 그 당시에 몇몇이 노동조합을 설립하려고 했거든요. 그때는 회사가 노동조합 생기는 걸 아주 심하게 방해할 때였어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서울대 나온 사람이 위장취업 했다고 완전히 간첩으로 몰아가면서, 우리를 앉혀놓고 간첩이라면서 머리채를 끌고 가는 거예요. 그때 누가 확 나서야 했는데, 저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죠.

그 사람 내보낸다면서 반장이 서명받겠다고 서명지를 들고 현장을 막 돌았어요. 저한테도 왔는데, 전 “저 사람도 돈 벌러 왔는데 어떻게 사인하냐”라고 사인 못 하겠다고 했죠. 그 사람이 혼자 잘 살겠다고 한 게 아니잖아요. 여러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한 거잖아요. 그래서 사인할 수가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사인했길래 놀랬지만요. 그래도 이미 안 한 거 모르겠다 했죠. 정식사원이니까 설마 자르기야 하겠나 싶기도 했고요. 아마 입사한 지 오래됐으면 고민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신금자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한국KDK지회 사무장이 생산한 파워코드를 들어보이고 있다. 지부 제공
신금자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한국KDK지회 사무장이 생산한 파워코드를 들어보이고 있다. 지부 제공

57일간의 직장폐쇄

노동조합 활동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그 뒤 시간이 좀 지나서 회사가 노동조합을 인정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냥 어용 하나 세워 놓은 거였어요. “그 사람은 너무 회사 편이다”해서 1989년에 우리가 투표로 새로 뽑았어요. 간부들도 인원이 워낙 많으니까, 서로 잘하려고 노력하고 노동조합도 강화됐거든요. 이제 다 갖췄구나 싶은데 회사가 덜컥 직장폐쇄를 해버렸어요.

직장폐쇄 기간은 어떻게 버텨냈나요?

노동조합 생긴 지 얼마 안 됐는데 직장폐쇄를 했으니까 돈이 없죠. 우리가 돈을 좀 걷기도 했는데, 걷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동국대, 서울대 다니면서 장사를 했어요. 그때는 대학생들이 많이 도와주고 호응도 해줘서 큰 힘이 됐죠. 지금은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서 아쉬워요.

회사에 넓은 식당이 있었는데 공장을 비우면 안 되니까 거기 바닥에서 교대로 먹고 자면서 지키고요. 아침이면 딱 일어나서 빨간 띠하고 조끼 입고 줄 딱 맞춰 서서 구호 외치면서 공단을 싹 돌았어요. 그러다 닭장차에 실려서 차도 안 다니는 난지도에 버려지기도 하고. 또 아침 출근조 들어갈 때 관리자들이 막으면 문 앞에서 쌈박질도 하고 별의별 일이 다 있었죠.

그렇게 57일 동안 우리가 버텼어요. 그러니까 회사도 협상 하자더라고요. 직장폐쇄 기간 임금을 다 받았어요. 임금도 10만 원 올렸어요. 그 당시면 정말 많이 올린 거예요. 왕창 올려버렸죠.

지부 제공
지부 제공

우리 딸이 유치원 다닐 때였어요. 한창 손 많이 갈 때였는데, 제가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먹고 자고 했죠. 사진 속 안경 쓴 여자아이가 제 딸이에요. 이제는 우리 딸이 마흔두 살이 됐네요. 노동조합 사무장을 맡으면서 딸한테 말했더니 기억하더라고요. “옛날에 맨날 이거(투쟁 손짓) 하고, 노래 불렀는데” 하면서 웃더라고요. 뭘 또 사무장까지 했냐고 하지만 그래도 제가 하는 일을 묵묵히 응원해주는 지원군이에요.

꼭 필요한 노동조합

노동조합을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저는 노동조합에 대해 잘 몰랐어요. 그런데 KDK 와서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우리가 57일을 버티고 승리했잖아요. 그 경험이 저한테 노동조합이 힘이고, 꼭 필요한 존재라는 강한 인상으로 자리 잡았어요. 이후로도 노동조합이 있어서 회사가 어떤 핑계를 대도 임금이 매년 올랐고, 단체협약 덕에 보장받는 내용도 많고요.

모든 부분에서 회사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까, 항상 노동조합하고 상의해야 하니까 여러모로 불안감과 걱정이 덜하죠. 만약에 노동조합이 없으면 회사가 “일거리 없으니까 너희들 좀 쉬어” 그럼 쉴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함부로 그렇게 못하니까요.

노동조합이 있으면 지회장이나 간부들도 있으니까 회사가 어렵다거나, 변동되는 상황들 생기면 여기저기 확인해서 조합원들한테 다 알려주고 설명해주니까 좋아요. 그래서 노동조합은 항상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합원 가입 안 한 분들 있으면 꼭 가입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한국KDK노동조합은 1995년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로부터 모범노동조합상을 받았다. 지회 제공
한국KDK노동조합은 1995년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로부터 모범노동조합상을 받았다. 지회 제공

조합원을 1순위로

전에도 노동조합 간부를 맡은 경험이 있나요?

전에 대의원을 두어 번 해봤어요. 확실히 조합원으로 있을 때는 신경 안 써도 간부를 맡으면 마음가짐이 달라지더라고요. 그때는 수련회를 많이 갔는데, 간부를 맡으면 벌써달라요. 조합원한테 한 번이라도 더 말 걸고, 더 친절해야 하니까 신경 쓸 게 많더라고요.

간부를 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나요?

전 간부 하면 무조건 조합원을 1순위로 챙긴다는 마음이 있어요. 조합원이 없으면 간부가 필요 없잖아요. 회사도 마찬가지예요. 사원 없으면 관리자고 사장이고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간부가 됐다고 으스대지 말고 조합원을 더 챙기고 더 다가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지회는 어떻게 활동하고 있나요?

지금 KDK는 조합원이 너무 적으니까 조합비가 없는 거예요. 지난번에 또 정년이신 분들 많이 나가고 나니까 조합비가 확 줄었더라고요. 그래서 지회장님이랑 우리 조합원들 밥 먹는 거는 지회장님하고 저하고 우리 둘이 사자고 했어요. 그래도 다행히 조합원이 하나하나 들어오더라고요. 사실 회사 오래 다니려고 하면 노동조합이 있어야 하니까요. 앞으로도 계속 들어올 거로 생각해요. KDK 있는 동안은 노동조합 문 닫을 일은 없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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