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반.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하루가 시작된다. 300여부의 신문은 3시간을 꼬박 돌려야한다. 5살, 3살 두 아이를 챙겨 아침 8시까지 어린이집에 맡기고 곧장 병원으로 향한다. 작년 파업 때 다친 손가락은 지금도 계속 통원치료 중이다. 한 시간의 물리치료를 받고, 쌍용자동차 지부 사무실에 오면 아침 10시. 낮에는 공장 앞 1인 시위, 선전전, 구속된 조합원들 면회와 재판, 힘들게 싸우고 있는 사업장에 연대투쟁으로 하루해가 넘어간다. 저녁에는 비정규직 조합원들과 지역 동지들과 만나고, 회의하면 번번이 10시를 넘긴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단 3시간. 20개월째 해고투쟁을 하고 있는 두 아이의 아빠, 비정규직 해고자 복기성 씨의 일과다.

▲ 77일 옥쇄파업 뒤 경찰서로 연행되고 있는 복기성 씨. [출처] [미디어충청 자료사진]

“제일 답답한 것은 가족의 생계죠. 그동안 금속노조에서 장기투쟁 기금이 나왔지만, 투쟁기금 부족으로 이젠 그마저도 끊긴 상태에요. 일하는 시간의 편차는 있지만,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낮에는 투쟁하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해요. 그런 일과를 반복하니까 정신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죠.”

해고 초반에는 보험을 해약하고, 친인척들에게 손 벌리다 보니 어느새 빚이 눈덩이처럼 늘었다. 그나마 ‘80%까지 되는 집 담보 대출 덕’에 몇 달 버텨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대출을 받을 수 있는 형편도 못 돼 잠자는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가 한 달 꼬박 일해야 받는 돈은 50만원이 채 안되지만, 해고투쟁과 생계를 병행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덮고

복기성 씨에게 투쟁도 생계도 걱정이지만, 아직 어린 두 아이들이 모두 아픈 게 제일 걱정이다. 눈이 큰 다섯 살배기 딸 민주는 ‘고관절’을, 또래 아이들보다 유난히 조용했던 세 살배기 아들 민중이는 언어장애를 앓고 있다.

“민주는 골반에 무리가 가면 다리와 장단지에 통증이 와요. 다리를 절룩거릴 때마다 병원으로 달려가 엑스레이를 찍어 관찰해야 해요. 그리고 민중이는 평택 언어 치료센터 가니까 원장이 ‘애랑 얘기를 많이 안 하냐’고 묻더라고요. 할 말이 없었어요. 애들이랑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거든요. 그나마 해고되고 실업급여도 안 나오니까, 의료 차상위 계층으로 선정됐어요. 덕분에 두 아이 병원비와 약값의 본인 부담금이 적어서 다행이죠.”

민주의 경우, 병원에서는 ‘가급적 움직이지 말고 집에 누워있게 하라’지만 한참 뛰어다닐 나이의 아이에게는 쉬운 요구는 아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야 뒤늦게 장애 사실을 알게 된 30개월 된 민중이는 7개월 된 아이들의 언어수준밖에 안 된다. 한참 말을 배울 그 시점이 딱 투쟁이 본격화된 시기라 아빠는 비정규직지회 임원으로, 엄마는 가족대책위 활동으로 정신없던 시절이다. 민중이는 평택시에 언어장애 바우처 치료의 혜택을 받고 있는데, 이런 혜택마저 없었다면 현재 한 달 수입으로는 아이들 치료비로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했을 게다.

현재 복기성 씨는 가대위에서 여성단체와 함께 진행 중인 심리치료를 신청해 놓고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다. 1년이 넘게 일주일에 2회씩 치료를 받아야 하는 민중이를 볼 때마다, 77일간 옥쇄파업 현장을 단 하루도 떠날 수 없었던 아빠는 그 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덮고 있었다.

▲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함께 한 77일 옥쇄파업, 도장공장 옥상에서 기자회견 중. [출처] [미디어충청 자료사진]

헌신짝처럼 버려진 비정규직

2004년 말 쌍용자동차가 상하이에 매각된 뒤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계속 고통과 희생을 강요받아 왔다. 2008년까지 정규직은 600여명이, 비정규직은 1,400여명이 해고됐다. 작년 정규직의 대량해고 계획 발표 전인 2008년 말, 비정규직 대량해고가 먼저 있었던 것이다.

“2008년 10월 21일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지회를 설립했어요. 10월 27일 정규직의 전환배치와 관련한 1차 노사 합의가 나왔는데, 전환배치의 실체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임이 밝혀지는 데는 열흘 밖에 걸리지 않았어요. 11월 5일 비정규직 노동자의 휴직을 담은 사측과 정규직 집행부의 2차 노사 합의서가 나와 바로 그날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몇 달치 임금도 떼인 채 강제 휴업에 들어가게 됐어요.”

‘진성도급’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설움 속에도 묵묵히 일해 온 현장에서 이들은 헌신짝처럼 버려졌고, 해고되고서도 주로 정문 밖에서 투쟁을 벌여야 했다. 공장 안에서 천막농성을 하려 했으나, 이들을 맞은 것은 사측 관리자들과 용역들이었다. 수십 차례 원청과 사내하청 업체로 교섭 공문을 발송하고 노동부와 법원에 하소연도 했지만, 비정규직 지회는 사측과 단 한 차례도 교섭을 하지 못했다.

“2009년 1월부터는 비정규직 간부들의 현장 출입이 봉쇄됐어요. 공장 안에 현수막을 걸거나 선전전을 하는 것조차도 못하게 됐죠. 3월부터는 그나마 형식적이었던 휴직이었지만 그마저도 업체 폐업과 해고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정해진 수순대로 강제휴직 뒤 업체는 폐업했고, 비정규직은 지회 간부들부터 조합원까지 순차적으로 해고됐다.

작년 5월 13일 쌍용차 지부, 비정규직 지회, 정비 지회 임원 3인이 굴뚝 고농농성을 시작하게 됐다. 원하청 공동투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정규직-비정규직, 산자-죽은자 할 것 없이 고용을 쟁취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 투쟁했다. 그렇게 77일간의 치열한 전투 뒤에 ‘쌍용차 회생을 위한 노사합의서’가 나왔다.

비정규직을 포함한 총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했지만,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노사합의 교섭에 비정규직 주체들은 누구하나 참여할 수 없었다. 비정규직과 관련해서는 “회사는 사내하도급 업체의 인력에 대해서는 현재의 공정을 유지하고 기고용 계약이 해지된 일부 인원에 대해 회사 내 업체의 취업을 알선한다”는 별도 확약서로 되어 있는 두 줄이 전부다.

▲ 09년 2월27일,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간부들이 삭발했다.[출처] [미디어충청 자료사진]

 

▲ 굴뚝 고공 농성에 돌입한 쌍용차지부 김을래 부지부장, 정비지회 김봉민 부지회장,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부지회장. [출처] [미디어충청 자료사진]

일자리는 있는데, 비정규직 조합원 쓸 일자리는 없다

“교섭 과정에서 회사는 10월 1일부로 비정규직들을 복귀시키겠다고 구두약속을 했어요. 그래서 8월 6일 공장을 나온 뒤 함께 투쟁했던 19명의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신상정보를 담은 명단을 회사에 전달했어요. 하지만 회사는 어느 것 하나 노사와의 약속이자 국민과의 약속이었던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았어요. 취업을 ‘알선’한다고 했기 때문에 개인별 업체 ‘면담’을 시켜준 게 전부였죠. 간부들에게는 ‘정말 더러운 환경에서 정말 힘든 일을 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냐’고 물으며, ‘죽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한다고 했더니, 업체 담당자들이 하는 말이 ‘기다리지 마라’였어요.”

‘일할 자리가 없다’던 회사였다. 그런데 얼마 전 비정규직 간부들이 고용보험 센터를 갔더니, 이전에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해고했던 업체에서 사람을 뽑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상시적으로 계약직을 쓰고, 최저시급 안 줘도 되는 알르바이트생, 실습생들을 썼어요. 5월에는 도장반 청소 일을 하던 고등학생 알바생의 손가락 절단 사고도 있었어요.”

열악한 환경에서 그 전에는 사내하청 직원들이나 밖에서 용역을 부르다가 시켰던 일을 이제는 고등학생들이 아르바이트와 실습생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다.

비정규직으로 복직? 정규직으로 고용하라

7월 22일 ‘제조업체의 사내하청 노동자는 근로자 파견에 해당하므로 2년이 경과했을 경우 정규직으로 간주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쌍용차 비정규직을 포함해 자동차 완성업체, 부품업체, 전자, 철강 등 최소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으로 일하는 여타 제조업 사내하청에도 모두 해당되는 일이에요. 판결 대상은 해고자, 퇴사자뿐만 아니라 사내하청 업체 노동자 중 2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이 다 대상이에요. 비정규직지회도 이제는 현장복귀 투쟁을 넘어 정규직화 투쟁으로 전개해야죠.”

그는 더 이상 지켜지지도 않은 합의서만을 붙잡고 할 게 아니라 수위를 높여서 매각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 쌍용자동차 공장점거 파업 1주년 투쟁결의대회. [출처] [미디어충청 자료사진]

생계도 어렵고, 투쟁도 어려운데, 정규직보다 먼저 해고투쟁을 시작하고도 19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09년 8월 6일 이후 1년여 가깝게 노동조합의 깃발아래 모일 수 있는 힘이 무엇일까. 그의 답은 명쾌했다.

“저도 조합원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요. 비정규직도 인간이기 때문이죠.”

비정규직도 인간이다. 이 짧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투쟁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작년 10월 하청업체 면담을 하고 나오셨던 50대 여성 비정규직 조합원이 떠올랐다. 그 노동자는 ‘10년을 일했던 회사에서 어느 날 갑자기 통보한 해고가 부당했고, 억울했고, 그래서 싸웠는데… 다시 일하게 해줄 것도 아니면서, 죄인취급하며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는 사측이 너무 한다’며 끝내 눈물을 흘렸었다. 그녀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는 정당했고, 반드시 현장으로 가야겠다’며 여전히 비정규직 지회와 함께 하고 있다.

이 땅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의미가 되는 현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한 실천은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백일자 현장기자 / 미디어 충청(cmedia.or.kr) 기사제휴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