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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갑질은 로맨스 도구가 아니다[미디어 속내 54] 재벌의 아픔을 이해해야 하는 드라마, 게으르다
김세옥  |  edit@ilabo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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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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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방송을 시작한 MBC 드라마 <시간>에 이런 장면이 나왔다. 재계서열 5위 안에 드는 그룹 총수의 아들이 자신, 아니 정확히는 부친의 소유인 백화점에 들렀는데, 여성 주차안내원이 VIP인 자신의 차를 알아보지 못하자 차 옆으로 불러 반쯤 무릎 꿇린 자세로 앉힌 후 짜증을 부린다. 이 모습을 본 다른 주차안내원이 불만 섞인 혼잣말을 내뱉는데, 이 말을 들은 재벌 2세 남성은 화를 내며 차 밖으로 나와 그를 밀쳐 넘어뜨리고 이에 항의하는 여성 주차안내원을 무릎 꿇린다.

드라마 홈페이지 속 등장인물 소개와 인물 관계도를 찾아봤다. 재벌 2세 남성은 남자주인공이었고 그를 소개하는 말은 이렇다.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첩의 아들’, 덕분에 성격 까칠하고 위아래 없고 예의와 매너는 밥 말아 먹은 지 오래다.” 가난하지만 밝고 긍정적인 캐릭터로 설정된 여자주인공인 주차안내원을 설명하는 대사는 “믿어요. 믿어달란 말 안 해도. 상무님은 좋은 사람이니까”이다. 인물 관계도 또한 앞으로 그들의 사랑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마도 까칠한 재벌 2세 남자주인공은 착하고 긍정적인 여자주인공을 만나 감춰둔 따뜻한 속내를 드러내게 되겠지.

   
▲ 한국은 여전히 공고한 신분제 사회이니 부모에게 사랑(인정)받지 못하거나 출생의 비밀로 폭력의 언행을 일삼는 재벌가 사람들(자식들)의 아픈 속내를 하층민인 노동자가 이해해야 한다? 사진=드라마 <시간> 인물관계도, 홈페이지 갈무리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이러한 캐릭터 설정으로 대체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걸까. 한국은 여전히 공고한 신분제 사회이니 부모에게 사랑(인정)받지 못하거나 출생의 비밀로 폭력의 언행을 일삼는 재벌가 사람들(자식들)의 아픈 속내를 하층민인 노동자가 이해해야 한다?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렇기에 이런 설정을 남발하는 드라마를 보며 방송국, 연출자, 작가가 게으르다는 말이 더욱 절로 나온다.

혹자는 이런 모습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평가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를 향한 재벌의 갑질 폭력 세태를 반영한 뒤 남는 게 로맨스라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불쾌하기까지 하다.

생각해보자.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물을 뿌려댄 광고주인 항공사 오너 일가의 딸이 알고 보면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으로 까칠해졌을 뿐임을 이해하며 사랑에 빠진 광고대행사 직원을 상상하기 쉬운가? 고된 비행을 끝낸 항공사 객실 승무원이 자신에게 “새빨간 장미만큼 회장님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게 한 회장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우연히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이해가 깊어져 결국 로맨스에 빠진다는 건?

창작물에 지나치게 현실의, 올바름의 잣대를 들이댈 순 없다고 한다. 맞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캐릭터의 까칠한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 차용하는 게 과연 성실한 창작자의 태도일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안톤 체호프는 극에서 권총을 등장시켰다면 무조건 한 발은 쏴야 한다고 했다. 발사하지 않을 총을 등장시켜선 안 된다는 것이다. 재벌의 갑질 폭력을 체호프의 총이라고 했을 때, 이는 극 중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까칠하다’라는 표현으로 갈음 혹은 미화된 캐릭터 설정의 도구이면 충분한가. 평소 삶 곳곳에서 크고 작은 갑질을 감내하며 밥벌이를 하는 평범한 시청자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셀링 포인트면 족한가.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참 나쁘게 후지네요.”

김세옥 _ 미디어 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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