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식 열사의 어머니는 스무 살 결혼해 일찌감치 병석에 누운 시어머니와 마흔두 살에 불구가 된 남편, 어린 삼 남매를 살뜰하게 키웠다. 녹록치 않은 살림과 가난 때문에 자식들을 상급학교에 보내지 못했지만 어머니 시골집에서 딸은 밥을 하고, 큰아들은 마당 쓸고, 작은아들은 마루를 닦으며 다복하고 평범한 가정을 이뤘다.

어머니는 경남 마산 진동의 작은 재래시장에서 좌판을 벌여 놓고 20년 넘게 생선을 팔아 자식과 남편을 부양했다. 소금에 절인 생선을 평생 만지다 보니 어머니의 손은 늘 부르트고 갈라졌지만, 어미 마음을 알아주는 든든한 자식들이 있어 행복했고 미더웠다. 어머니의 시련은 둘째 아들 정경식 열사가 실종되면서 시작됐다.

▲ 2010년 9월8일 서울 중구 정동 금속노조 앞에서 열린 '노동해방 열사 정경식 동지 전국민주노동자장' 영결식에서 열사의 어머니가 열사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동준

정경식 열사는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서 장갑차를 만들던 노동자였다. 대우중공업노동조합은 1987년 5월 대의원‧지부장선거를 치렀다. 민주파 지부장 당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던 정경식 열사는 지부장 선거에 패배하자 회사가 개입한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어 재선거를 준비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사측 조합원과 폭행사건이 발생했고 1987년 6월8일 폭행사건 합의를 위해 공장에서 외출한 후 실종됐다.

그 후 가족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정경식 열사를 찾아 나섰다. 정경식 열사는 실종 이듬해인 1988년 3월 2일 창원 불모산에서 유골로 발견됐다. 당시 검찰은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은 채 정경식 열사가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험난한 진상규명 투쟁에 나섰다. 어머니에게 정경식 열사는 방문 잠가 놓고 혼자 낳은 복덩이 아들이었으며 삼 남매 중에서 당신을 제일 많이 닮아 더욱 애달픈 아들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것이 너무도 아깝고 서러웠다. 영어책을 끼고 다니며 영어 선생님 되는 것이 꿈이었던 정경식 열사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가난과 건강 문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늘 안쓰러웠다.

어머니는 당신이 엄마 노릇을 못해서 그리 죽었다고, 당신이 아들을 사지로 몰아냈다며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정경식 열사는 생전에 어머니께 “저를 믿고 의지하세요. 제가 어머니 꼭 모실게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상하고 살갑던 정경식 열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어머니 환갑을 해주겠다던 아들이 실종되고, 당신의 환갑날 딸자식에게 받은 밥상 앞에서 식구들 모두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밤꽃 필 무렵 갑자기 사라진 아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는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고향인 마산 진동에서 서울을 오가며 노숙 농성과 집회, 시위를 마다하지 않았다. 1998년 11월부터 시작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부모님들의 천막 농성에 합류하여 1999년 12월 30일까지 422일 동안 농성장을 지켰다. 이로써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의문사위원회가 설립돼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졌다. 뒤이어 진실화해위원회에서도 정경식 열사 사망사건을 조사했지만,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해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되었다.

▲ 2010년 9월8일 서울 중구 정동 금속노조 앞에서 열린 '노동해방 열사 정경식 동지 전국민주노동자장' 영결식에서 조합원들이 열사의 영정에 꽃을 바치고 있다. 신동준

진상규명 투쟁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살아있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이웃의 따가운 시선과 사회적 냉대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더욱 억척스럽게 아들을 찾아 나섰고, 더‘과격’해 졌는지도 모른다. 아들 회사에 찾아가 항의한 것 때문에 교도소에 갇히고, 수감 중 교도소장 면담을 요구하며 단식했고, 단식 끝에 김영삼이 넣어준 사식을 모았다가 소장 얼굴에 던져버렸다. 당신은 죄지은 것이 없다며 교도소에서 죄수복을 벗고 생활하던 어머니.

“똥 묻은 주걱이라도 팔아서” 자식을 찾겠다는 어머니가 당시 회사가 제시한 수억 원의 위로금을 두고 “아들이 크나, 돈이 크나” 라고 반문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정경식 열사에 대한 진상규명이 안 되면 아들을 땅에 묻지 않겠다던 어머니의 굳은 신념은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그리고 23년 만에 ‘노동해방열사 정경식 동지 전국노동자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떠나는 아들에게 “노동자의 밑거름이 되라”고 했던 어머니는 이제 불면의 밤을 보내고 계신다.

막심 고리키 소설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며 진상규명투쟁을 계속하고 계신 어머니.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정경식 열사의 어머니는 과연 어떻게 비춰질까. 정경식 열사는 살아 있는 어머니의 투쟁에 대해서 무어라 답할까. 죽은 정경식 열사를 노동자 역사 속에 살려 낸 어머니의 투쟁은 그래서 아름답고 슬프다.

민주노조 건설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바친 정경식 열사.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고단한 육신과 영혼마저 편히 쉬지 못하고 당신을 누가 어떠한 이유로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른 채 방치되어 있는 정경식 열사. 그러나 어머니의 기도와 노동으로 다시 노동자로 태어난 정경식 열사여, 오늘 밤 어머니의 고운 꿈에 찾아가 어머니의 굵은 눈물 닦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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