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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신 이어 민주노조 사수한다[금속열사열전 13] 박창수 열사(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
박성호  |  edit@ilabo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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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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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열사가 일한 한진중공업은 부산 영도 봉래산 자락 아래 있는 조선소다. 부산경제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는 향토기업이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면 선체 모형 머릿돌에 ‘대한민국 조선 1번지’라는 글씨가 1960~70년대 조선소 노동자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채 서있다. 2011년 김진숙 동지가 정리해고를 막아보겠다고 85크레인 위에 올라 309일간 투쟁을 전개했던 조선소다. 양심이 있는 시민들이 크레인 위 여성용접공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전국 방방곳곳에서 자발적으로 ‘희망버스’에 몸을 싣고 네 차례나 왔던 공장이다.

 

25년 어용노조 몰아내고 민주노조 깃발을 올렸다

1953년 한국전쟁 직후 휴전과 동시에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노조는 암울한 정세에서도 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전면파업 하며 ‘체불임금 청산촉구’ 투쟁을 벌였다. 노동조합이 1959년 12월13일 전면파업에 들어가자 영도경찰서는 노조 사무실에 난입해 파업지도부를 강제 연행했다. 경찰의 만행에 굴하지 않고 조합원들은 23일간 파업을 계속하여 체불임금을 쟁취하는 성과를 올렸다.

1960년 8월 정부기업인 대한조선공사를 민간업체에 불하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나오자 도크 바닥을 점거하고 전체 조합원들이 철야농성으로 민영화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정부는 경찰병력을 투입해 간부들을 전원 연행한 후 핵심간부들을 구속했다. 이틈을 타 회사는 직장들을 중심으로 어용노조를 만들었다. 회사와 어용노조는 25년 동안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유린했다.

   
▲ 한진중공업지회가 2011년 5월4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단결의 광장에서 ‘박창수 열사 20주기 정신계승제’를 열고 있다.

어용노조 25년 활동에 정면으로 맞선 동지는 김진숙 이었다. 1986년 부서 대의원으로 당선된 뒤 대의원대회에 참석해보니 말 그대로 어용들의 소굴이었다. 간부들은 조합비를 사비처럼 썼고, 위원장은 임기를 마치고 나면 연립주택 하나를 챙겼다. 김진숙 대의원은 대의원대회에 다녀온 뒤 유인물을 만들어 어용노조의 실체를 낱낱이 공개했다. 조합원들은 처음으로 선전물을 접했고, 노동조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회사는 현장의 동요를 막기 위해 김진숙과 이정식, 박영제 조합원을 해고한다. 해고자들은 매일 아침 출근투쟁을 벌였다. 출근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어용노조 간부, 부산시경 형사들이 나와 해고자를 폭행하고 김진숙 대의원을 대공분실로 연행해 고문했다.

해고자 투쟁은 민주노조 깃발을 세우는 밑거름이 되어 25년의 어용노조 벽을 허무는 7․25투쟁으로 폭발했다. 해고자들은 1987년 7월 25일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임금인상 쟁취하여 가족에게 사랑받자, 식당에서 밥 먹고 싶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공구를 놓고 투쟁의 깃발을 올린다. 노동자 4,500여 명이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공장 정문을 열고 도로로 나갔다. 조선소 소장이 나와 조합원들에게 모든 요구를 다 들어 줄 것이니, 도로 점거만은 풀어달라고 했다. 어용노조 간부들 또한 분노한 조합원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조합원들의 단결된 힘으로 요구조건을 모두 관철하고 위원장 직선제를 쟁취할 수 있었다. 한진중공업에서 25년간의 어용노조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 박창수 열사는 배관공장 조합원 과대표로 투쟁 중심에 서 있었다.

 

험난한 민주노조 사수의 길

박창수 열사는 1990년 9월 96%의 압도적 지지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회사와 정부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을 강성노조로 낙인찍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 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서울구치소에 구속된 박창수 위원장을 찾아가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대기업 연대회의 탈퇴를 종용했다. 이런 가운데 박창수 열사는 서울구치소에서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 안양병원 놀이터에서 죽임을 당했다. 안기부가 개입한 의문의 사건이었다. 박창수 열사의 죽음을 접한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은 모두 일손을 놓고 안양병원으로 올라와 박창수 열사 옥중 살인 진상규명 투쟁을 전개했다.

   
▲ 1991년 5월 7일 백골단이 박창수 열사의 시신을 뻬앗으려 콘크리트 벽을 뚫고 안양병원 영안실에 난입하자 유족들이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창수 열사 이후 한진중공업지회(아래 지회)에서 열사 세 분과 희생자 한 분이 나왔다. 2003년 손배가압류 철회와 한진의 막가파식 노무정책에 항거해 김주익 열사와 곽재규 열사가 목숨을 바쳤다. 최강서 열사는 2012년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158억 철회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김금식 희생자는 김주익 열사 사망 후 우울증을 앓다 정리해고 투쟁 중이던 2013년 목숨을 끊었다.

 

열사정신 계승은 산자들의 몫이다

한진중공업 자본은 2011년 김진숙 조합원의 85크레인 고공농성 이후 어용노조를 설립했다. 어용노조를 만들고 지회와 교섭을 중단하고 단체협약 해지를 통보했다. 한진중공업은 기업노조를 대표노조로 만들기 위해 “기업별노조로 넘어오는 사람만 현장복귀를 앞당겨 주겠다. 생활자금 1,000만원을 주겠다”고 조합원을 회유하며 지회 무력화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기업노조는 과반수를 넘겨 대표노조가 되었다.

현재 한진중공업 자본은 채권단이 요구하는 임금동결과 단체행동권 박탈을 요구하는 동의서를 강요하고 있다. 이미 기업노조는 자발적으로 동의서에 서명했고 지회는 노동자의 단결권을 포기하라는 동의서를 거부한 상태다. 회사의 탄압은 더욱 심해지지만, 박창수 열사의 정신을 끝까지 계승하고 있는 지회는 당당하게 자본을 이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사정신을 실천하는 길임을 지회 조합원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박창수 열사가 우리들의 곁을 떠난 지 25년이 흐르고 있는 지금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은 이어지고 있다. 민주노조를 사수하는 길이 더 험난하게 다가오고 있는 시대이지만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열사정신을 민주노조의 산 정신으로 삼고 그 자리를 끝까지 사수하고 있다.

박성호 / 노조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 열사정신계승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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