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제스트판으로 읽은 장편 소설은 책 제목이라도 나오면 아는 척은 할 수 있으나 읽었다고 하기는 찜찜하다.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읽기도 쉽지 않다. 강화도는 다이제스트판으로 읽은 소설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아닐까. 수학여행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배를 타고 석모도에 다녀오다가, 마니산 산행 뒤에 몇 곳을 둘러보기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수련회나 모임이 끝나고 곁다리로 역사기행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역사기행지로 강화도롤 추천하면 뜨악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가보았는데 뭣 하러 또 가냐는 눈치다. 하지만 한번 가보았어도 다시 가면 새롭게 볼 것이 있다. 연륜과 준비 정도에 따라, 계절과 분위기, 같이 가는 사람들에 따라 느낌도 달라진다.

이 땅 구석구석 어느 곳 하나 이전의 역사가 첩첩이 쌓여 있지 않은 곳이 없다. 한강, 예성강, 임진강 어귀에 있으면서 서울의 관문이었던 강화도는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를 함축하여 안고 있다. 강화도가 담고 있는 주요한 역사 현장은 청동기 시대 부근리 고인돌과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과 강화도 천도, 조선시대 청의 침입으로 인한 ‘병자호란’, 19세기 후반 침략해 들어오는 프랑스, 미국과 치열하게 싸웠던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벌어졌던 곳이다. 그 사이 사이에도 숱한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 갑곶의 탱자나무와 안내판. 신동준

강화도, 청동기부터 신미양요까지 한 눈에

평일이 역사기행 하기에는 더 좋다. 사람에 치이지 않고, 차분히 돌아보며 꼼꼼히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4월에는 이미 일정이 빼곡하게 잡혀 있었다. 평일에 갈 수 있는 날이 없다. 할 수 없이 일요일인 4월8일 금속노동자 신동준 국장과 강화도 갑곶, 고려궁터, 부근리 고인돌, 강화역사박물관, 외포리, 정수사, 전등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선원사지를 답사했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에 있는 갑곶돈대부터 들렸다. 매표소에서 갑곶돈대, 고려궁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을 들어갈 수 있는 ‘5개소 일괄관람권’을 끊었다. 따로 입장권을 사면 모두 4300원인데 일괄관람권은 2700원이다. 갑곶에 있던 ‘강화역사관’은 폐관되어 지금은 없다. 1988년 세워진 뒤부터 강화도 역사기행을 할 때면 이곳에서 강화도 역사를 개괄하고 시작할 수 있어 좋았는데 아쉽다. 2010년 10월 23일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옆에 ‘강화역사박물관’이 개관되어 역사관에 있던 유물들을 모두 그 쪽으로 옮겼다.

‘갑곶’은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이 육지와 강화도 사이에 있는 염하강을 바라보며 자기들의 갑옷으로 메워도 건널 수 있을 텐데 못 건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초병들이 강물만 믿고 방비를 소홀히 하다가 청병의 기습으로 함락되었으며,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이 이곳을 점령한 뒤 강화성으로 들어갔다. 갑곶에는 나이가 400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78호 탱자나무가 있다. 화도면 사기리 정수사 쪽에 있는 천연기념물 79호 탱자나무와 함께 탱자나무의 북방한계선을 이루고 있다. 나무 아래 “강화도에 처음 탱자나무를 심게 된 이유가 성벽 밑에 적병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고 성을 보호하려고 탱자나무를 심었던 사정을 말한다. 나무줄기와 가지는 엉클하고 날카로운 가시로 적을 막는 몫까지 담당하였으나, 열매는 별 쓸모가 없으니 ‘하는 일 없이 뒹굴뒹굴 논다’는 뜻으로 쓰이는 ‘탱자탱자하며 논다’는 말은 여전히 합당할까.

▲ 일요일을 맞아 고려궁터로 역사기행을 나온 초등학생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신동준

강화도에 3년여 만에 와 보았더니 그 사이에 고려궁터 올라가는 길 왼편에 2005년에 5월에 착공하여 2008년에 완공한 용흥궁 공원이 널찍이 펼쳐져 있다. 대형버스도 댈 수 있게 해 놓았다. 주차장 뒤쪽 성공회 강화성당 가는 길옆에 ‘강화도령 첫사랑 길’ 안내판이 서 있다. 철종(1831-1863)의 아명인 원범이 강화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봉이(양순이)와 사랑을 나두던 길을 지도로 그려 놓은 것이다. 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 ‘강화도령’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천막을 치고 만든 가설극장에서 필름이 낡아 비가 내리는 것 같던 흑백영화였다. 이서구의 방송드라마를 신상옥 감독이 영화로 만든 것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로 꼽던 신영균, 최은희, 김승호, 도금봉이 출연하였다. 왕으로 발탁된 원범이 나룻배를 타고 염하강을 건널 때, 건너편 언덕에서 배웅하는 봉이(양순이)에게 “양순아” 하며 부르던 애절한 이별 장면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용흥궁으로 가는 길은 용흥궁 공원에서 성공회 강화성당 아래 오른 쪽으로 나 있다. 용흥궁은 원범이 왕이 되기 전 19세까지 5년 동안 살던 집이다. 왕이 된 뒤 강화유수 정기세가 민가를 헐고 새로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했다. 내전, 외전, 별전이 기와집 건물로 남아 있다.

용흥궁, 원범과 봉이의 사랑이 깃든 곳

조선의 제 25대 왕 철종이 된 원범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할아버지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아버지는 전계군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와 형이 반역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11세 때부터 강화도에 유배살이를 하던 원범은 19세 때, 헌종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물려받았다.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로 책봉하였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철종을 주색에 빠지게 하여 정사(政事)는 돌보지 못하고 정사(情事)에만 매달리게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1862년 전국 70여개 지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 철종은 민란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삼정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을 일부분 개혁하려고 하였다. 강화도 유배시절 꼴 베고 나무해본 경험이 일반 백성들의 처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했을 것이다. 문제는 철종과 뜻을 같이하는 세력이 개혁을 추진할 힘도 의지도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병약했던 철종은 ‘임술민란’을 겪고 난 다음해 33살 나이로 재위 14년 만에 숨졌다.

▲ 몽고 침입에 대비해 세운 고려 강화산성의 북문인 진송루 앞에 박준성 선생이 서있다. 신동준

용흥궁 공원 뒤쪽 언덕 위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광무 4년)에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 코프가 대한성공회에서 가장 먼저 세운 성당이다. 전통 한옥 구조에 서양 기독교 양식을 수용해서 지었다. 밖에서 보면 조선시대 절 모양이다. 2층 현판도 한자로 ‘天主聖殿’이라고 새겨서 걸었다. 건물은 경복궁을 건축한 목수가 지었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 마침 예배시간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들려왔다. 성당에서 들으니까 절에서 듣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곧 이어 건물 안 쪽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신동준 국장이 건물과 소리를 DSLR 카메라로 잡아 보여 주었다. 강화도로 오는 차 안에서 동영상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솔깃하였는데, 캠코더는 아니라도 동영상 촬영에 적합한 DSLR로 카메라를 업그레이드 해야겠다는 욕망이 더 커졌다.

송악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고려궁터는 몽고의 2차 침입 직전인 고종 19년(1232년)부터 개경으로 돌아온 원종 11년(1270넌)까지 39년간 머물던 터이다. 고려의 최우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몽고의 침입에 저항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몽고의 약탈 방화 살육에 맞서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려고 대몽항쟁에 참가했던 농민들은 지배층들의 수탈과 억압에도 저항하였다. 최우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겉으로는 항몽을 표방하였지만, 몽고와 싸움을 피하고 유리하게 협상하려는 입지를 마련하는 한편 드세지는 민중의 저항으로부터 지배층의 안전과 정권을 보호 하려고 강화도로 ‘도망’친 것이었다. 강화도로 옮겨온 고려의 귀족들은 개경을 그리워하며 송도와 비슷하게 궁궐을 지었고, 뒷산도 송악이라고 불렀다. 육지에서 대몽항쟁이 전개될 때 최씨 정권은 별초군을 뽑아 올려 정권유지에 급급하였고, 계속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이 시기 고려 문화의 정수라고 불리는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상감청자들이 만들어졌다. 이들도 몽고침입기라는 시대의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문화이다.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상감청자 강화도에서 꽃피다

고려궁터는 당시에 여러 궁궐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범위가 넓었을 것이다. 지금은 정확한 범위를 가늠하기 어렵다. 조선 인조 때 이곳에 행궁을 건립하고 전각과 강화유수부, 외규장각을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함락되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 의해 모두 불타 없어졌다. 그 이후 복원된 강화유수부 동헌, 이방청, 강화 동종, 외규장각만이 남아 있다. 고려궁터에 세워져 있으나 ‘고려궁’과는 무관한 건물들이다. 강화유수부 동헌에 걸려 있는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은 영조 때 학자이며 명필로 이름을 날린 백하 윤순이 쓴 글씨를 새긴 것이다. 고려궁터의 범종각에 있는 종은 모조품이고, 1711년(숙종 37년)에 만들어진 진품은 강화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국종의 특징인 음통이 없다. 몸체 가운데 튀어 두 줄로 테를 두른 것도 다른 고려 종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다.

▲ 진송루 아래로 내려가면 강 건너 보이는 북한 땅. 신동준

외규장각에는 1천여 종 6천책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프랑스 함대가 200여 종 359책을 약탈해 갔고, 남은 책들은 모두 불태웠다. 빼앗겼던 외규장각 도서는 2011년 6월,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145년 만에 돌아왔다. 복원한 외규장각 뒤쪽 언덕위로 올라가 내려다보면 강화읍내와 행궁 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귀퉁이에 수령이 400년 넘었다고 하는 회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담장 너머로 그 나이 쯤 되었을 은행나무가 서 있다. 그 은행나무 밖까지 조선 시대 행궁이었을 것이다.

고려궁터 왼쪽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강화산성의 북문인 ‘진송루’가 있다. 강화산성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1232년에 쌓은 성이다. 성의 남문을 안파루, 서문을 첨화루, 동문을 망한루, 북문을 진송루라고 불렀다.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진송루를 빠져나가 북쪽을 보면 날씨 좋은 날은 강 건너 저 멀리 개성 송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어느 땐가 그 곳에서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을 본 적이 있다. 허리 굽은 노인네가 토지문서 같은 종이를 들고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언제 남으로 내려왔을까. 해방 후 바로, 아니면 1950년 한국전쟁 때 였을까.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는 마음도 가지가지 다를 것이다.

박준성/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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