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여름. 골목길 중턱 모퉁이에 자리한 술집에 옹기종기 앉아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명의 중소사업장 노동자들. 직장 동료 허리디스크가 터졌다. 벌써 두 번째다. 첫 번째는 허리통증이 심해 부서장에게 말을 했더니, 부서장이 무조건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몇 개월 뒤 허리디스크가 완전히 터졌다. 부서장 얼굴빛이 달라지더니 이직을 생각하란다. 해당 당사자도 주변 동료들도 당황했다. 10여년 넘겨 다닌 직장인데 이직이라니. 속 쓰린 소주 한잔을 마시며 분노도 삼켰다.

▲ 2월15일 화신지회 전체조합원이 중식집회를 마친 뒤 지회깃발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북= 박수경
그리고 문득 술상을 탁 쳤다. ‘민주노총에 가보면 어떨까?’ 고민과 함께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혼자 가서 물어보는 것 보다는 여럿이 함께 물어보는 것이 낫다며 모두 자리에 일어났다. 어렵사리 민주노총 전북본부 앞에 들어섰다. 쿵꽝쿵꽝 거리며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술기운을 이용해 문을 두드렸다.

술자리서 노조가입 결의한 사연

당시 그 술 취한 노동자는 현재 화신지회 김상호 지회장이다. 그와 일행은 동료의 10여년 직장생활에 대한 허탈감과 회사에 대한 분노에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6개월 동안 조용히 동료들을 만나며,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조직했다. 전체 생산직원 46명과 함께 2012년 1월 2일 드디어 노동조합 창립총회를 진행했고,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 여승일 부지회장이 "나이 마흔 넷이다. 노동조합 건설과 발전에서 성취감을 느꼈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인생에서 노조가 차지하는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전북= 박수경
전라북도 전주시 옆 완주 3공단에 위치해 있는 ‘화신’. 2천 평 공장부지에서 프런트 액슬을 조립하는 중소사업장. 12미터 조립라인 두 곳에서 대형과 소형 프런트 액슬을 생산직원 46명이 나눠서 각각 조립한다. 아침 8시 시업, 밤 8시 30분 종업 12시간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지만 신입사원은 최저임금, 13년 근속노동자는 연봉 2천 8백 여 만 원 정도.

직장생활 15년 동안 겨울 내내 난로 하나로 버티는 공장. 겨울아침에는 너트하나도 못들 정도로 추워, 옷을 두 겹 세 겹으로 껴입고 혹한기 훈련을 하는 공장. 자재창고가 휴게실인 공장. 입김으로 담배를 피우는 공장. 손가락에 깁스 한 번하지 않으면 직원이 아닌 공장. 다쳐도 다쳤다고 고통을 말할 수 없는 공장. 아파도 일해야 하는 공장. 안전교육 등은 한 번도 하지 않고, 서명용지에 묻지마 싸인하는 공장. 이곳이 ‘화신’이다.

노조 가입 뒤 현장이 변했다

금속노조 가입 뒤 15여 년 동안 변하지 않았던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여승일 화신지회 부지회장은 “창립이전 15여 년 동안 나이만 먹었다”며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로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여 부지회장은 “회사의 태도가 변했다”고 말한다.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이 빨갱이들이 하는 짓이라던 회사가 복지대책을 내놓았다. 일을 쉬지 않고 하면 춥지 않다했던 회사가 전기스토브를 거의 1인당 1개씩 지급했다. 노동자들 말을 무시하고 모르쇠 하던 회사가 서서히 귓구멍을 열어 듣는다.”

무엇보다 노동자들 눈빛이 달라졌다. “얼굴에서 생기가 돈다. 몇 명되지도 않는 동료들이 따로따로 나뉘어졌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가족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다쳐도 쳐다보지 않고 나만 아니면 뭐’하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현장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서로 관심을 갖고 함께한다고 한다.” 김현호 화신지회 교선부장과 이충열 대의원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 김상호 화신지회장이 노동조합 건설 배경과 지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북= 박수경
화신지회장은 현재 회사와 교섭중이다. 지회는 난로하나에서부터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 △노동조합 인정 △임금성의 근속, 기혼, 만근수당 △산업안전보건위원회 구성 등의 기본적인 요구안을 가지고 교섭을 펼치고 있다. 김 지회장은 “꿈꾸었던 교섭이 현실이 되어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꿈만 꿨던 ‘교섭’이 현실로

지회는 회사의 노동조합 방해 행동에 대해서도 차분히 대처하려고 노력한다. 지회는 일방적인 회사의 전체 조합원 경영설명회도 막아냈다. 지회는 전체조합원 회식자리를 마련하여 의견을 수렴하고, 투쟁의 의지를 높여내고 있다. 금속노조 전북지부의 도움을 받아 교섭에 필요한 많은 자료와 경험도 습득중이다.

“완주 3공단에 이 곳이 처음 생긴 노동조합인 만큼 잘 해서 완주공단 노동조합 건설의 초석이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김상호 지회장은 이같이 결의를 밝힌다. “나이 마흔 넷이다. 반복의 생활에서 이제 남은 인생을 노동조합을 통해 성취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여승일 부지회장이 짧게 각오를 다진다. 올해 서른 한 살 된 김현호 교선부장은 “젊은 혈기로 모든 난관을 헤쳐나갈 자신이 있다”며 자신감을 드려냈고 “노동조합 안착화 뒤 장가가고 싶다”고 웃음을 더했다. 직장동료의 고통에 함께하고자 시작했고, 여러 가지 노동악조건을 탈피하고자 스스로 희망을 찾아나 선 화신지회 새내기 조합원들. 이들이 만들어 갈 희망의 역사를 기대한다.

▲ 김현호 화신지회 교선부장과 이충열 대의원은 "조합원들 얼굴에서 생기가 돈다. 끼리끼리 나뉘었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가족 같은 느낌이 든다"며 앞다퉈 말한다. 사진 왼쪽부터 김현호 지회 교선부장,김상호 지회장,여승일 부지회장,이충열 대의원. 전북= 박수경
* 현장에서 희망을 찾기 어려운 시절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허덕이며 지키기만 해도 성공했다 표현할 정도입니다. ‘희망만으로 변화할 세상없다’라고 하지만 희망마저도 없다면 아찔할 겁니다. 어떠한 어려운 조건과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투쟁의 승리를 담보할 큰 무기가 됩니다. [현장에서 희망을]은 금속노조 각 현장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을 담는 연재코너입니다. 금속노조 조합원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