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노협 위원장 네 번과 금속노조 전신인 민주금속연맹과 금속산업연맹 위원장을 거쳐 민주노총 위원장 두 번. 이 과정에서 11년이 넘는 시간을 수배와 옥살이로 보내야만 했던, 한국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단병호.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직을 끝낸 2008년 봄부터 4년 째 공식 활동 없이 살았던 그가 ‘이사장’으로 돌아왔다.

지난 17일 평등사회노동교육원(아래 교육원)이라는 이름의 교육기관이 공식 개관했고 단병호는 이곳의 이사장이 됐다. 이사장이 된 지 나흘 만에 만난 그는 “정치? 그런 생각 현재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긋는다. “내 나름대로 잘 할 수 있는 역할이 이거고, 이거 하나 하는 것도 잠 못 이룰 지경”이라고 말문을 연다.

▲ 단병호 전 위원장(전 국회의원). 신동준
타임오프제도와 복수노조 시대라는 제도적 환경, 그리고 정리해고와 직장폐쇄 등 일상적인 자본가들의 탄압. 여기에 노조운동의 역량을 집중하기에도 바쁜 요즘, 이른바 ‘교육운동’을 하겠다니 좀 한가하게도 들렸다. 그랬더니 그는 “한가하다고?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전쟁 중일 때도 전쟁에 투입될 훈령병을 계속 양성하는 법 아니냐”고 되묻는다. 단병호는 이제 예순 셋 나이에 노동운동 훈련소 소장을 자임한 셈이다.

‘이사장’으로 돌아온 단병호

“87년 이후 노동자들의 임금과 생활조건은 개선됐지만 노동자들 의식은 기업중심주의와 경제적 실리주의에서 넘어서지 못했고 오히려 이것이 더 심화됐다”고 말하는 단병호. “어렵다, 힘들다, 위기다 등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말을 잇는 그는 “열심히 하는 사람 맥 빠지게 하려는 소리가 아니고 이런 현실을 좀 심각하게 사실대로 인식하자는 것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아무래도 노동운동이 장기적인 침체국면이 될 것 같다”고 말하는 그가 ‘노동운동 훈련소장’이 되어야겠다고 작심한 건 2009년 말부터였다.

▲ 지난 1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창립식이 열렸다. 각계에서 1백 50여 명이 모였고 단 이사장이 백기완 선생과 나란히 앉아있다. <사진제공=평등사회노동교육원>
그 때부터 ‘백년대계(百年大計)’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비로소 지난 해 3월 2백 여 명이 각각 1백 만 원 씩 내서 2억 여 원의 ‘종자돈’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 뒤 1년 3개월이 흐른 지난 17일 교육원 공식 개관 때까지 모두 5백 37명이 발기인으로 동참했다. “발기인에는 현장노동자도 있고 학자도 있으며, 시민사회단체와 정당활동 하는 사람도 있다”고 단 이사장이 소개한다.

1년 반 동안 사람만 모인 건 아니었다. 그 동안 ‘노동운동가 양성’ 프로그램과 교재개발에만 70여 명이 달라붙었다. 단 이사장은 “교재개발팀을 작년 4월 꾸렸고 작년 하반기부터 교육 프로그램 개발 작업을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교육원 개관 때 내놓은 건 주 1회 세 달 열 두 강좌 기초과정 프로그램. “노동운동 활동경험 2~3년 정도의 초급활동가를 대상으로 하고 10~15명 수준으로 학급을 꾸리면 적당하다”고 덧붙인다.

▲ 지난 4월 초 단 이사장이 경북대병원노조 사무실에서 대구지역의 교육원 발기인들과 간담회를 열고 있다. <사진제공=평등사회노동교육원>
이색적인 것은, 교재가 두 종류 있다는 것이다. 단 이사장은 “교육에 참여하는 학생용 교재와 교육을 안내하는 강사용 교재가 따로 있다”고 말한다. 강사용 교재란 ‘수강생들끼리 이런 내용이 토론될 수 있도록 이렇게 유도하시오’, ‘이런 결론이 도출 될 수 있도록 이런 도움을 주시오’ 식의 내용이 수두룩하게 담긴 안내교재다.

“아무래도 노동운동, 장기침체국면 같아”

▲ “물론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제대로 된 노동운동 역량 재생산 체계와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줬다면 내가 노조 바깥에서 이런 것 할 필요 없다”며 쓴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이어 단 이사장은 “민주노총이 사실상 대중적 교육운동을 방치해왔던 것 아니냐”며 꼬집는다. 민주노총 등 노동조합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노동자 의식 재생산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신동준
“사람 모으게 한 뒤 한 두 시간 떠들 사람 보내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식의 그런 교육으로는 안 된다.” 그가 강조하는 바다. 교육원이 꺼내 놓은 것은 참여식 교육이다. 프로그램을 잠시 엿보니, 퀴즈도 풀고 조별토론과 분반토론도 한다. 학생 각자가 발표도 하고 실습도 한다. 세 달 열 두 강좌 동안 특강 한 차례를 제외하고 오직 한 사람만이 이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진행강사로 투입돼 10여명을 이끈다. 초등학교 담임제와 비슷하다.

그리고 그 진행강사도 교육원에서 따로 보낸 사람이 아니다. 해당 사업장, 혹은 해당 지역에서 노동운동 10~20년 경력을 가진 ‘선배’라면 누구든 교육원의 프로그램과 교재를 공급받아 ‘후배’를 양성하는 진행강사가 될 수 있다. 물론 단 이사장은 “그래도 10년, 20년 된 선배활동가도 제대로 된 강사역할 하려면 교육원에서 마련한 강사훈련을 서 너 차례 받아야 하지”라고 강조한다.

교육원의 역할은 바로 각 지역과 현장의 의욕있는 ‘활동가’들에게 교육프로그램을 공급해주는 것이다. 널린(?) 게 선배활동가고, 선배활동가가 후배 10여명 모으기란 어렵지 않고, 알찬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해 줄 교육원까지. “이렇게 교육이 쉽게 대중적으로 확산되게끔 해보자는 것, 이것이 우리 교육원의 설립 취지”라고 단 이사장은 힘줘 말한다.

교육원 개관에 앞서 단 이사장은 충남, 서울, 창원에서 세 달 짜리 기초과정을 시범적으로 가동시켜봤다. 벌써 45명이 교육원 개관도 하기 전에 그 맛을 본 셈이다. 울산에서는 벌써 두 개 팀 30명이 절반 능선까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모두 각 지역의 ‘선배급’ 현장노동자가 진행강사를 맡았다. 경북 포항에서는 수 명의 활동가가 진행강사를 하겠다며 교육원으로부터 ‘강사단 훈련’을 세 차례 받은 상태다. 대구에서는 최근 진행강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한 데 모으고 있는 과정이라는 게 단 이사장의 설명이다. 단 이사장은 “이런 교육 처음 접한 사람들 대체적으로 호평을 쏟아놓는다”고 자랑한다.

주 1회 세 달, 열 두 강좌 참여식 교육

그런데 이런 식의 교육프로그램,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에서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이에 대해 단 이사장은 “물론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제대로 된 노동운동 역량 재생산 체계와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줬다면 내가 노조 바깥에서 이런 것 할 필요 없다”며 쓴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이어 단 이사장은 “민주노총이 사실상 대중적 교육운동을 방치해왔던 것 아니냐”며 꼬집는다. 민주노총 등 노동조합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노동자 의식 재생산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 단병호 전 위원장의 왼손에는 전노협을 상징하는 반지가 자리잡고 있다. 전노협 이후 이 반지를 손에서 뺀적이 없다. 신동준
“금속노조가 노동교육에 대한 의지를 언제 표명한 적 있냐?”고도 되묻는다. 단 이사장은 “내가 보기에 교육연수원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했는데 아직도 답보상태이니 안타깝다”며 “노동운동의 초점을 ‘현재’에만 찍어놓으면 ‘미래’를 어떻게 담보할거냐”고 말한다. 그래도 단 이사장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노동교육 체계와 시스템만 갖춘다면 우리 교육원과 상호협력적이고 보완적인 관계설정이 가능할 것”이라며 기대도 아끼지 않았다.

단 이사장은 사람의 생각과 의식이 바뀌는 경로가 두 가지라고 강조한다. 하나는 실천적인 경험이고 또 하나는 교육과 학습이다. “현실적인 실천투쟁을 핑계로 교육과 학습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단병호 이사장. 그에게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교육원 문을 열었으니 공식적으로 기초과정 1기생을 모집할 것이다.” 단 이사장은 내년까지 노동운동 입문과정에 있는 노동자 3백 명이 기초과정을 이수케 한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 지난 3월 중순 충남지역의 노동자들이 교육원 기초과정 프로그램 시범 운영과정에 동참했다. 한 교육 참가자가 ‘내가 노동자로 살면서 느끼는 가장 불안한 점과 억울한 점’을 직접 작성하고 있다. <사진제공=평등사회노동교육원>
일방적으로 강의만 듣고 돌아가는 노동자가 아니고, 교육에 직접 참여하고 말도 하고 토론도 벌이며 실습도 해 본 노동자 3백 명이 1년 만에 생긴다는 것. 이건 작은 사건이 아니다. 단 이사장은 “지역별로 기초과정 1기생 개강일정은 편차가 있겠지만 일단 7월 6일 서울에서 첫 1기생 개강계획이 잡혀있다”고 소개한다.

“노동운동 미래 어떻게 담보할거냐”

교육원은 현재 기초과정 윗 단계인 중급과정 교안과 프로그램 개발단계에 착수한 상태다. 이는 기초과정 이수자와 노동운동 경력이 더 된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다. 단 이사장은 “내년에는 중급과정의 윗 단계인 고급심화과정 교안과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노동자들로 하여금 ‘아, 저 교육 받아보고 싶다’는 모델을 창출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 단 이사장에도 물론 고민거리가 있다.

▲ 지난 4월 초 교육원 기초과정 세 번 째 모임을 진행하고 있는 울산지역 노동자들. ‘비판적 의식 : 관심과 관점>이라는 주제를 놓고 교육참여자들의 참여형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제공=평등사회노동교육원>
바로 ‘돈’이다. 교육원 가동 시스템이, 필요한 곳에 강사를 투입해 강사비를 받아 운영하는 수익구조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교재와 프로그램 개발에 투입되고 있는 70여명을 운영하고 그들을 한 곳에 모아 회의라도 할 수 있으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단 이사장은 CMS 출금동의서가 담긴 교육원 회원가입신청서를 내민다. “대중적인 교육운동 필요성에 동의하고 노동운동의 새로운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매달 1만 원 이상씩 회비를 내는 회원제로 운영한다”는 게 단 이사장이 말하는 교육원 운영방식이다.

“성장동력이 재생산되지 않고 소진된다면 한국노동운동은 역사 속에서 화려함으로만 남을 뿐 향후 우리 사회를 바꿔나가는 역할을 할 수 없게된다”는 게 예순 셋 된 단 이사장의 절박감이다. 한국 노동운동 초창기 때 유행했던 소모임 학습을 한층 현대화된 방식으로 세포분열 하듯 확산시켜보자며 이사장 직함 달고 다시 돌아온 단병호 ‘위원장’의 꿈. 하나를 심어 하나를 얻는 것은 곡식이요, 하나를 심어 열을 얻는 것은 나무며, 하나를 심어 백을 얻는 것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때보다 노동운동이 쉽지 않은 지금, 특히 복수노조 시대라는 노조 간 경쟁체제를 앞두고 있는 지금. 옛 말을 되새기며 단병호의 꿈에 동참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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