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복지공단의 업무상재해 인정 기준이 까다로워 재해 노동자와 가족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사회보장적 성격이 강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의 취지가 퇴색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공단이 법적기준이나 법원의 판례보다 공단의 내부지침을 우선적으로 적용한 결과 업무상재해 인정기준이 지나치게 좁게 해석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 2월24일 국회도서관 대회의실에서'근로복지공단 산재인정기준의 문제점'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강정주

24일 오후 국회도서관 대회의실에서 ‘근로복지공단 산재인정기준의 문제점’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는 금속노조·금속노조 법률원·이미경 민주당 의원실·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실·진보신당·참여연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공동주최로 진행됐다.

“노조 전임자도 산재 인정해야”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권동희 공인노무사(노동법률원·법률사무소 새날)는 노조 전임자에 대한 업무상재해를 인정하지 않는 공단의 내부지침을 비판했다. 현행 산재보험법의 적용대상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다. 산재보험법은 업무상재해에 대해 “업무상의 사유에 따른 근로자의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조 전임자는 산재보험법 적용대상일까 아닐까. 산재보험법에는 전임자에 대한 별도 규정이 없다. 때문에 노조 전임자의 산재 인정 여부를 둘러싼 쟁송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상당수의 법원의 판례는 전임자의 근로관계상 지위에 대해 ‘휴직상태의 근로자’와 유사한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판례는 “노조 전임자는 사용자와의 사이에 기본적 노사관계는 유지되고 근로자로서의 신분도 그대로 가지는 것이지만 근로제공의무가 면제되고 사용자의 임금지급의무도 면제된다는 점에서 휴직상태에 있는 근로자와 유사하고, 사용자가 단체협약 등에 따라 노동조합 전임자에게 일정한 금원을 지급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근로의 대가인 임금이라고 할 수는 없다”(대법 94다54566·대법 97다54727·대법 2003다4815,4822,4839 등)고 판단하고 있다.

▲ 법원이 예외적 경우를 뺀 대부분의 사례에 대해 전임자의 업무상재해를 인정하는 것과 달리, 공단은 전임자의 업무상재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경주지부간부들이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금창화 ITW대림사무장 산재불승인규탄' 선전전을 하고 있다.

이 같은 논리에 따라 법원은 전임자의 업무가 회사의 노무관리업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보고, 전임자가 노조업무를 수행하거나 노조활동에 수반되는 통상적인 활동을 하는 과정에 재해가 발생한 경우 업무상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있다(대법 92누14502·대법 96누16179 등). 다만 법원은 △전임자 업무의 성질이 사용자의 사업과는 무관한 상부 또는 연합관계에 있는 노동단체와 관련된 활동 △불법적 노조활동 △사용자와 대립관계가 형성되는 쟁의단계에 들어간 이후의 활동 등 예외적 경우에 발생한 재해에 대해서는 업무상재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법원이 예외적 경우를 뺀 대부분의 사례에 대해 전임자의 업무상재해를 인정하는 것과 달리, 공단은 전임자의 업무상재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공단은 최근 ‘근로시간면제자’의 지위에 대해서도 “노조업무만을 전담한 근로시간면제자는 산재보험법에 의한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이에 대해 권 노무사는 “노동부는 근로시간면제자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바 없고, 오히려 근로시간면제자는 유급으로 처리돼 사용자로부터 임금을 받을 수 있으며 노사공동의 이해에 부합하는 업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판례 법리상 인정되는 ‘노무관리업무의 밀접성’ 표지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행 노동부의 기준상 근로시간면제자는 임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공단이 이에 대해 산재보험법 적용을 위한 보험료 징수를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나 다름없다”며 “전임자의 업무상재해 인정을 위한 행정해석과 지침 변경이 필요하고, 산재보험법이나 고용보험법에 ‘휴직상태 근로자’에 대한 조항을 추가하는 내용의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까다로운 사고성재해 인정기준, 법원 판단 제한”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김혜선 공인노무사(금속노조 법률원)는 ‘사고성 재해에 대한 산재 인정기준의 문제점’에 대해 발표했다. 옛 산재보험법은 업무상재해의 인정기준을 노동부령으로 정했다. 시행규칙에서 ‘업무상 사고’와 ‘업무상 질병’의 기준을 명시했다. 공단은 이러한 시행규칙의 기준에 따라 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법원은 “상위법령에 근거를 두지 않는 시행규칙은 산재보험법 관련 행정청 내부의 사무처리준칙에 불과하다”며 시행규칙에 따라 실무를 처리하는 공단에 비해 폭넓게 업무상재해를 인정해 왔다.

▲ 발제자 권동희 노무사는 “현행 노동부의 기준상 근로시간면제자는 임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공단이 이에 대해 산재보험법 적용을 위한 보험료 징수를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나 다름없다”며 “전임자의 업무상재해 인정을 위한 행정해석과 지침 변경이 필요하고, 산재보험법이나 고용보험법에 ‘휴직상태 근로자’에 대한 조항을 추가하는 내용의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성기업 아산지회 노동안전부장이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들과 작업환경 측정을 하고 있다. 이정민

2008년 산재보험법이 개정되면서 업무상재해의 종류가 ‘업무상사고’와 ‘업무상질병’으로 모법에 분류됐다. 옛 산재보험법상 시행규칙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게 시행령으로 옮겨졌다. 이 때문에 기존에 법원이 부정해 온 시행규칙상의 인정기준이 법규성을 인정받았고, 업무상재해로 인정될 수 있는 업무의 개념과 범위가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났다.

가령 옛 산재보험법에는 명시돼 있던 ‘휴게시간 중 사고’ 규정이 법 개정 후 사라진 것이다. 공단은 상위법 규정인 ‘사업주의 지배·관리하에 있었는지 여부’만을 판단기준으로 삼는 등 기존 시행규칙보다 좁은 범위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김 노무사는 “업무상재해 인정요건이 전반적으로 까다롭게 변경됐고, 시행규칙으로 규정돼 내부 운영지침으로 기능하던 인정요건들이 충분한 법적 검토 없이 시행령으로 개정되면서 법원의 판단을 제한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며 “법원의 인정기준에 맞춰 공단 실제 운용기준을 설정해야 하고, 산재보험법이 재해 노동자와 가족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보장 제도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업무상재해의 인정기준과 승인 여부가 보험재정 문제에 좌지우지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업무상재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재근로자가 있다면, 공단은 업무와 전혀 무관함을 밝혀야 하고 이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업무상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며 업무상재해 입증책임 주체가 근로자에서 공단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재 인정받기 어려워진 뇌심혈관·근골격계 질환”

대표적인 과로성 재해인 뇌심혈관계 질환의 산재인정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해 노동자들이 업무상재해를 인정받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왔다. 산재보험법상 과로성 질병은 뇌심혈관질환과 정신장해로 구분할 수 있는데, 뇌심혈관질환은 ‘업무 수행 중 신체에 부담을 주는 업무 등 근로자의 건강에 장해를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을 취급하거나 그에 노출돼 발생한 질병’에 해당해야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될 수 있다.

▲ 김혜선 노무사는“업무상재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재근로자가 있다면, 공단은 업무와 전혀 무관함을 밝혀야 하고 이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업무상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며 업무상재해 입증책임 주체가 근로자에서 공단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제조업 사업장 노동자들이 환기장치가 미비한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희자 공인노무사(세명공인노무사사무소)는 2008년 7월 근로복지공단 지역본부별로 업무상질병을 심의·판정하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가 출범한 뒤 뇌심혈관질환의 업무상재해 불승인율이 높아졌다고 비판했다.

이 노무사는 “질판위 설치로 심의절차가 복잡해지고 처리기간이 길어져 피재근로자들에게 정신적 고통이 되고 있고, 공단지사 담당자가 재해조사를 해 지사 자문의의 ‘업무와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소견을 받아 질판위로 송부해도 정작 질판위가 불승인 판정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 피재근로자 보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근골격계질환에 대해 ‘퇴행성 질환’이라는 이유로 업무상재해를 불승인하는 공단의 판단기준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됐다. 박영만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는 “공단이 근골격계질환에 대해 퇴행성이라는 이유로 불승인하는 사례가 다수 있으며, 이에 대해 법원은 다양한 기준을 동원해 업무관련성을 평가하고 업무상질병을 인정하고 있다”며 “퇴행성이라는 용어의 정의와 사용에 대해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며 공단의 재해조사절차와 인정 기준이 좀 더 구체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구은회 기자/ 매일노동뉴스(labortoday.co.kr) 기사제휴.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