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하면 많은 사람들은 ‘88서울올림픽’을 떠올릴 것이다. 당시 정부와 기업들은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국가의 운명이 걸린 것처럼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그들은 “이제 곧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오를 것”이라는 장미빛 환상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올림픽 성공개최하면 경제 성장한다’, ‘경제 잘 되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다’ 올림픽에 나라의 운명이 다 걸린 것처럼 호들갑이었다. 얼마 전 G20때처럼 말이다.

올림픽에 온 나라가 들썩이던 1988년 7월, 우리나라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첫 페이지를 열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15살 소년 문송면 군이 온도계·압력계를 만드는 협성계공에서 일하다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는 공장에서 두 달도 채 일하지 못했다. 공장에서의 두 달, 소아병동에서의 넉 달, 그리고 15살 문송면은 눈을 감았다. 온도계에 있는 수은주를 가는 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문군은 가는 유리관인 수은주를 빨대 삼아 입으로 수은을 들이마셔야만 했다. 수은이 바닥에 흘러넘쳤고 노동자들은 보호장구도 없이 일했다. 문 군을 죽음으로 내몬 열악한 노동환경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박향주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문송면 군의 죽음으로 노동환경이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노동자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올림픽 당시 군사정권이 핏대 높여 부르짖던 경제성장도 해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에 20년 전 문송면 군과 같은 이들은 더 이상 없는 것일까?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연구소가 있는 면목동 녹색병원을 찾은 날, 추위가 한결 누그러졌다. 병원 입구에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런데 여느 병원과는 달리 미술 작품이 병원건물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숟가락·주전자·냄비·수도꼭지·장난감차·놀이공 등 폐품으로 만들어졌다. 그 제목이 ‘노동을 위하여’다. 병원 이름은 녹색이고, 병원 정문에 있는 작품 이름은 ‘노동을 위하여’라니! 우리나라 병원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작년 금속노조 발암물질조사사업으로 바쁜 한해를 보낸 선옥남 연구원은 “내가 속해 있는 산업위생실이 발암물질과 작업환경을 조사하는 일을 한다”며 “산업위생실 이외에 직업성근골격계질환센터와 산업의학실 그리고 교육센터로 구성돼 있다”고 연구소를 소개했다.

20년 전 수은중독 사망 그 사건

선 연구원에게 “발암물질조사를 위해 현장을 직접 방문했을 때, 그리고 그 결과를 확인했을 때 어떤 기분이였나”고 물었다. 그는 “그동안 학교수업과 책으로만 쌓아온 나의 지식이 한 순간에 흔들리는 느낌이였다”고 당시 소회를 밝혔다.

“생각보다 열악한 작업현장에 놀랐다”는 선 연구원은 “조사결과를 확인하고 더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발암물질조사차 지난해 노조 63개 사업장을 다니며 9천여종의 화학물질을 조사했던 곽현석 산업위생실 작업환경측정팀장 역시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발암물질들이 사업장 곳곳에 널려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곽 팀장은 “원진레이온노동자들의 투쟁 이후 건강권에 대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커졌다”며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발암물질조사를 해보니 여전히 개선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 2월23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들이 충남지부 유성기업 아산지회에서 작업환경 측정을 위해 조합원에게 시료채취펌프를 달아주고 있다. 이정민

노동환경연구소(이하 연구소)는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소속으로 지난 1999년 만들어졌다. 원진재단은 이황화탄소 중독과 합병증으로 쓰러져간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만든 곳이다. 문송면 군의 죽음이 직업병에 대한 인식을 심어줬다면,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투쟁은 조직적 직업병 인정 투쟁의 시작이었다.  

인조견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이황화탄소가 원진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개별적으로 회사와 정부에 억울함을 호소해봤지만, 별다른 결과는 없었다. 1988년 문송면 사건으로 직업병이 사회적 조명을 받게 되자 원진 노동자들은 더욱 집단적 행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에 그들은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며 함께 나서게 된다. 산업역군이라며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칭송되다 일순간 '산업쓰레기'로 버려진 노동자들이 망가진 몸을 이끌고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만든 그곳

원진 노동자들은 끈질기게 싸웠고 그 결과 1990년 부족하나마 111명의 노동자가 직업병 인정을 받았다. 1993년 7월 회사가 문을 닫자 노동자들은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고 결국 정부와 파산관리주체인 산업은행이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그 해 12월 보상기금 관리와 지급을 맡을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설립, 1999년에 직업병 전문병원인 녹색병원과 연구소가 문을 열게 됐다.

곽 팀장과 선 연구원은 원진재단과 연구소가 가진 역사성에 대해 강조했다. 곽 팀장은 “원진 투쟁 이후 노동자들이 재수없고 나이먹어 아픈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 얻은 직업병이라 스스로 깨닫기 시작”했다며 “86,87,88년 노동자대투쟁시기와 맞물리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환경에 대해 들여다보게 됐다”고 평가했다. 선 연구원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인해 노동자들의 힘으로 원진재단을 세웠다”며 “그런 역사가 연구소의 가장 큰 의미”라고 말했다.

요즘 연구소 사람들은 작업환경측정조사와 안전교육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곽 팀장은 작업환경측정조사를 의례적으로 하는 단순사업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그는 “법은 여전히 기업배려차원에서 최소한을 보호할 뿐”이라며 “제도상 의무적으로 하는 간단한 조사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곽 팀장은 “회사가 최선을 다하도록 노동조합이 계속 주문해야한다”며 “작업환경측정도 꼼꼼히 하고 평상시에도 작업환경에 대한 모든 내용들을 기록하고 보관해야 한다”고 말했다. “철저한 작업환경측정과 일상적인 문서화 작업이 관리와 개선을 가져온다”며 “그 과정에서 남은 기록들이 직업병 인정여부를 다투게 될 경우 결정적인 자료가 될 것“이라고 곽 팀장은 덧붙였다.

▲ 2월23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들과 유성기업 아산지회 노동안전담당자가 작업환경 측정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정민

곽 팀장과 선 연구원은 인터뷰 내내 '안타깝다'는 표현을 썼다. 선 연구원은 “올해 안전교육은 주로 발암물질조사결과에 대한 내용인데 조합원들도 그렇게 심각하냐며 놀라워했다”며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는 조합원들도 일부 있어 좀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작업환경측정 때 보면 반팔차림에 마스크도 없이 독성물질을 직접 만지는 분들이 많다”며 “위험성은 알지만 보호장비는 답답해서 잘 안하게 된다며 머쓱해하신다”고 말했다.

곽 팀장은 겨울에 반팔을 입고도 땀을 뻘뻘 흘리는 노동자들에게 “그래도 위험하니 작업복에 마스크 꼭 하시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며 “작업복과 방진마스크같은 장비는 불편한데다 최소한의 보호막인 만큼 결국 회사가 유해물질없는 깨끗한 작업환경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재수없고 나이먹어 아픈게 아니다”

제 2의 문송면, 제 2의 원진레이온은 없는 거냐고 물었다. 곽 팀장은 “1970, 80년대에는 경제발전이라는 명목아래 노동자의 건강권이 마구 짓밟혔다”며 “경제도 성장하고 민주화 바람으로 이제 노동현장도 달라지겠지 기대감은 커갔지만 몇 년 못가 외환위기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곽 팀장은 “조합원들의 건강권에 대한 인식은 분명 달라졌다”며 “근골격계 질병도 예전에는 단순히 나이 먹으면 다 그런거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산업재해로 당당히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변화는 분명 있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데 외환위기 이후 일자리가 위태로워졌다”며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실직의 공포에 노동자들이 입을 닫았고 참기 시작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선 연구원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얘기하기도 했다. 그는 “위험요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조직력으로 노동환경을 점차 개선해 가고 있다”며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삼십년 전 원진 노동자들이 그러했듯이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위험한 노동을 계속하고 있다”며 걱정했다.

▲ 충남지부 유성기업아산지회 홍종인 노동안전부장은 “다른 업체마냥 조합원에게 측정기계 달아주고 시간되면 기계 가져가는 형식적인 조사를 하지 않는다”며 “조합원들에게 평소 작업에 대해 꼼꼼하게 묻고 조사사업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준다”고 연구소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유성기업 아산지회 한 조합원이 방화복 등 안전장구를 착용하고 주물작업을 하고 있다. 이정민

올해 작업환경측정조사를 노동환경연구소와 함께 진행한 충남지부 유성기업아산지회 홍종인 노동안전부장은 “다른 업체마냥 조합원에게 측정기계 달아주고 시간되면 기계 가져가는 형식적인 조사를 하지 않는다”며 “조합원들에게 평소 작업에 대해 꼼꼼하게 묻고 조사사업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준다”고 연구소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곽 팀장은 “조사하는 그 순간에는 조합원들이 불편해하지만 철저한 조사가 불안해소와 예방에 도움을 줄 것”이라며 “우리들의 조사사업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건강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대충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금속노조와 조합원들에 바라는 것은 없을까. 선 연구원은 “노동자 건강과 관련된 모든 사업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겠지만 노조에서 조합원들에게 작업환경에 대한 내용을 끊임없이 알리고 함께 바꿔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곽 팀장은 “노동자들은 닫힌 말문을 트고 회사를 향해 불편하고 위험하다고 당당히 얘기해야한다”며 “특히 노동조합은 지난 날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처럼 건강권 문제를 담장 밖으로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금속노조가 중장기적 계획을 갖고 노조 내 연구소를 열길 기대한다”며 “노조와 노동자가 노동환경과 건강권 문제를 주도하고 이를 독자적으로 이끌어가야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흔히들 녹색병원과 노동환경연구소를 노동자의 눈물로 세운 곳이라고 표현한다. 노동자의 눈물로 세운 연구소인만큼 앞으로도 계속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노동자에게 힘이 되어 주길 주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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