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대개 ‘우리 회사 다니는 아무개에요’이라고 친구를 소개했다면, 요새는 ‘예전에 어떤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이에요’라고 소개합니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옛 구로공단)에서 15년 넘게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는 구자현 금속노조 서울남부지역지회장이 이 지역 노동시장 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며 한 말이다.

구로공단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연대파업이었던 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25년이 넘는 세월을 겪으며 당시 노동운동을 대표했던 공장들은 지방과 해외로 옮겨가거나 폐업했다. 대신 디지털단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까번쩍한 15층 아파트형공장 건물들이 들어서고 전자산업, 정보통신산업이 대거 유입됐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노동자 12만명 가량이 일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서울 최대의 산업단지다. 굳이 통계를 들지 않더라도 출퇴근 시간 이 지역을 방문해 보면 몸으로 그 규모를 느낄 수 있다. 지난 1일 아침 구 지회장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가산디지털단지역. 설연휴 직전이지만 출근하는 인파로 가득 차 ‘걸어간다’는 것보다 ‘사람에 밀려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다.

하지만 화려하고 거대한 겉모습과는 달리 이 지역 노동자 절대다수는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5년 단병호 민주노동당 전 국회의원실이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 신규 채용대상 중 정규직은 3.4%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고용이 불안정한 파견 등 간접고용과 기간제 일자리다. 사업장 규모도 극도로 영세해 2010년 말 통계로 평균 근로자 수가 12명밖에 안 될 정도다. 구 지회장은 “공단 내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50%가량 되는데, 여기서 일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딱 법정최저임금 수준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변화된 노동시장의 표본,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이 같은 노동시장 변화는 IMF이후 끊임없이 추진돼 온 정부와 자본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의 결과물이라는 지적이다. 구 지회장은 “현대차와 같은 재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꾸준히 늘리는 것과 더불어 외주화와 하청을 통해 배를 불려왔다”고 강조한다. 대공장 정규직의 처우를 일정정도 보장해 주는 대신 비정규직과 하청 노동자들을 착취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해 왔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결과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를 비롯한 국내 각 공단의 노동자들은 중소영세사업장들을 전전하며 말 그대로 떠돌이 밑바닥 인생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

▲ 예전에 공장이 즐비했던 구로공단은 이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어 옛 공장대신 아파트형공장건물들이 들어섰다. 이 단지에는 12만명이 일하고 있으며, 그 중 절반가량이 생산직이다. 이중 대다수는 간접고용 형태며 법정최저임금 정도를 받는다.

특히 구 지회장은 “이러한 노동시장 분화가 노동자들이 하나로 단결하기 힘든 조건을 만들어 왔다”며 “과거에는 기업별로 단결해 사용자에게 무언가를 따 낼 수 있었다면 공단의 노동자들은 이것이 거의 불가능한 처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노동부가 발표한 2004년 자료에 따르면 서울관악지청이 포괄하는 지역의 노동조합 조합원 수는 전체 근로자 대비 5.5%로 서울강남을 제외하면 최하위이며 서울 평균 16.5%에 크게 못 미친다. 관악지청은 관악, 동작구와 함께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있는 구로, 금천구를 담당하고 있다.

만연한 간접고용으로 사실상 단결권을 박탈당한 공단의 노동자들. 게다가 설사 단결한다 하더라도 누구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 헷갈릴 수밖에 없는 복잡한 산업 구조.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

“기업별 조직화는 불가능에 가까워”

구 지회장은 노동자들이 기업별로 단결할 수 없는 조건에서 ‘지역’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한 조직화를 강조하고 있다. 공단에서 같은 어려움들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이 지역차원에서 힘을 합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미 민주노총은 지난해 10월 이 지역을 전략조직화사업 단위로 결정,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세부 계획을 수립 중이다.

사실 기업의 틀을 넘기 위해 지역을 강조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기업별로 조직된 조합원의 울타리를 넘어 전체 금속노동자를 대변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산업별노조인 금속노조 출범 정신이기도 하다. 구 지회장은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결성된 청계피복노조 역시 기업이 아닌 공단 차원의 노조였으며, 실제 지역의 사용자들과 단체 교섭을 벌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문제의식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말과 구호로는 이 같은 방향을 강조하면서도 실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사업은 아직 기업 틀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 지회장은 “금속노조가 산업별노조의 이름을 걸었지만 형식에만 매달려 실제 내용을 못 채우고 있다”며 그간 금속노조가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해 왔다고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아울러 그는 “언제부터인가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이해가 노조로 묶이지 않은 공단의 광범위한 노동자들의 요구와 분리되고 있음을 느낀다”며 “이것이 민주노조 운동이 어려움에 봉착한 가장 큰 이유”라고 진단했다. 민주노조 운동이 ‘우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치우쳐, 미조직 노동자들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거나 여러 특화된 영역 중 하나로 치부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지역’ 중심의 미조직 사업, 금속노조의 준비는 과연

올해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 구 지회장이 벌이고자하는 사업도 과거에 줄 곳 해 왔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 평화시장에서 전태일 열사가 가장 먼저 벌인 사업인 실태조사,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바보회’를 결성해 동료들을 규합했던 일이 그것이다.

금속노조 서울남부지역지회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 시민사회 단체 및 진보정당들과 함께 올해 지역의 노동실태조사 사업을 담당할 남부노동복지센터를 설립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구 지회장은 노동복지센터가 실태조사와 더불어 △상담 및 법률서비스 △노동자 권리증진을 위한 지역 감시감독 활동 △노동자 교육, 문화, 복지사업 △노동자 소모임 운영 지원 등의 사업을 벌이며 과거 전태일 열사의 ‘바보회’처럼 공단지역의 노동자들의 공동체로 발전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더불어 공단지역 공통의 의제를 기반으로 공단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투쟁도 계획 중이다. 현재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 공동투쟁 의제로는 △최저임금 △파견노동 △연봉제 △근로기준법 적용 △노동자 건강권 등 5가지로 압축된 상태다.

물론 과거와 다른 점도 있다. 이번 사업은 사용자 눈을 피해가며 몰래 사람들을 모아내는 일이 주였던 과거와는 달리 대대적이고 공개적으로 진행한다. 오는 18일 서울 구로에 있는 한국산업단지공단 앞에서 서울남부노동자권리찾기 사업단 ‘노동자의 미래’가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 출범할 예정이다. 사업단은 이날 지역 노동자와 함께하는 길거리 노동 상담을 벌이며, 저녁엔 문화제도 개최한다.

옛 구로공단에서 ‘노동자의 미래’를 밝힌다

‘노동자의 미래’는 올 한해뿐 아니라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꾸준하게 다양한 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구 지회장은 “많은 지역에서 그간 임단협 기간에만 잠깐 교섭위원들 동원해 선전전 벌이는 수준으로 미조직 사업을 진행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서울남부지역에서 제대로 된 공단 사업의 모범을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미조직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사업을 단순히 불쌍한 노동자들 구제하겠다는 인식으로 출발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업은 특화된 영역이 아니라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생명선으로 틀어쥐고 가야 해요. 그래야 민주노조 운동이 광범위한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으며, 지금의 탄압을 이겨내 공세를 취할 수 있어요.”
구 지회장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 복잡하고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항상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했던 노동운동의 정신, 이것을 되새기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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