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지방 선거 이후 6개 시도에 ‘진보교육감’이 당선된 뒤 진보적인 교육정책이 정치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다. 단순히 아이들 밥 먹이는 문제라 치부되었던 무상급식은 시장의 이름으로 ‘국민투표’를 붙일만한 이슈가 되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단순한 메시지인 체벌금지는 학교를 막장으로 몰고 가는 정책인양 묘사되면서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교육 문제가 정치의 주요 문제로 대두한 것은 지역감정이나 계파갈등보다는 우리의 가장 기본 생활이 정치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국민들이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의 진보’다.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우리 삶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왠지 슬프다.

서울시장의 버티기 작전에도 불구하고 무상급식은 그래도 조금씩 확장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학생인권조례’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위기를 겪고 있다. 두발자유, 체벌금지, 강제야간자율학습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 조례에 빨간불이 켜졌다. 교육부가 모든 학칙 개정의 권한을 교장에게 일임하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발효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조례가 통과된 경기도의 경우 학생인권을 침해해왔던 교칙을 교사-학생-학부모의 공청회와 토론을 통한 공동체 규칙으로 개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교육부 뜻대로 된다면 경기도의 산물은 무위로 돌아간다. 이런 엄청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시선은 무상급식과 좀 다르다.

학생인권조례 빨간불

왜 그럴까? 이는 왠지 아직 법적으로 미성년인 학생들에게 어른들과 똑같은 권리를 준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또한 어른들이 이미 겪어온 당시 학창시절에 대한 향수도 있다. 아울러 가정에서 만나는 자신의 자녀를 만날 때의 못미더움 같은 것이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갸우뚱한 마음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러는 동안 언론은 연일 체벌금지로 인해 학생과 교사 간 폭행이 일어나고 수업시간에 전혀 통제되지 않는 막장 교실이 되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마치 파업으로 인한 손실과 국가 신인도 하락을 다루는 기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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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요즘 학교생활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체벌금지 때문인가? 체벌금지 하나로 교실이 무너질 만큼 교사는 무능력하고 교실이 만만할까? 교사가 어찌할 줄 몰라하는 것은 이런게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이후 한 반에 기초수급자와 차상위 계층 학생은 꾸준히 늘었다. 반대로 이들에 대한 지원은 점점 줄어들었다 의료보험료 차이 1천 원으로 어느 아이에게 점심식사 지원을 해줘야하나 고민해야할 판이다. 기본생활이 안 되는 아이들이 학습결손이 심하고 일탈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일제고사, 입학사정관제 등 연일 쏟아져 나오는 교육정책은 이른바 ‘없는 애’들에게 점점 더 따라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되고 있다. 교사들은 돌봄 받지 못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찌할 줄 몰라하고 있는 것이다.

‘쟤네들’ 머릿속 해부하기

▲ 필자.
그런데도 체벌금지 때문에 교사가 괴로운 것처럼 선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권은 어찌보면 간단하다.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저들은 미래의 노동자가 될 학생들이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야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을 두려워한다. 저들 머릿속에 노동자들은 회사가 요구할 때마다 인간다운 노동조건을 포기하고 ‘작업’에 동원돼야 한다. 아울러 생산성 향상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관리자들의 모욕도 감수할 수 있어야한다. 결국 엘리트(?) 한 두 명이 수백만의 노동자를 먹여 살린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이다. 이들 머릿속에는 강제 보충과 야간자율학습을 당연하게 여겨야 노동자가 됐을 때 야근도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힘 있는 존재가 나를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힘있는 관리자의 부당한 해고도 그럴 수 있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다. 이는 ‘인간’임을 외치는 선언이었다. 노동자들도 두발자유를 외쳐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회사 규정에 따라 모두 스포츠머리를 해야 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회사 정문 앞에서는 덩치 큰 경비대원들이 손에 바리깡을 든 채 두발단속을 벌였다 한다. 1987년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떨쳐 일어났을 때 노조가 노동자를 상대로 가장 원하는 변화가 뭔지를 물어보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1순위로 꼽힌 것은 “월급을 올려달라”가 아니라 바로 두발자유였다.

청소년에게 학생인권조례는 ‘근로기준법’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이갑용 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들에게 머리카락은 굴종, 체념, 부끄러움, 억울함, 그런 것들의 상징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에게 두발자유는 사람으로 대접받을 권리이자 내 몸을 내 뜻대로 결정할 권리이기도 했던 것이다. 바로 사람이 될 권리였던 셈이다.

우리가 학생인권조례를 한낱 부모가 다 대주는 철없는 아이들의 불평 정도로 치부하는 사이, 저들은 그런 정서에 힘입어 학생들이 인간으로 자라날 기회를 원천봉쇄한다. 청소년은 부모나 학교의 소유물이 아니라 미래의 노동자로서 이 사회의 주인이 될 사람들이다. 이것이 인간다운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싸우는 노동조합이 학생인권조례서명운동에 앞장서야하는 이유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에게 있어 전태일의 바로 그 ‘근로기준법’이다.

조영선 / 서울 경인고등학교 교사

* 필자는 서울 경인고등학교 교사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믿으며 아이들에게 뭔가 가르친다기 보다 ‘괜찮은 사람’, ‘의미있는 타인’으로 함께 살고 있는 교사라고 스스로 소개한다. 약자에게 많은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는 믿음으로 학생인권에 관해 금속노조 조합원들에게 앞으로 이야기를 들려줄 계획이다.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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