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마저 버리고 떠난 공장을 5년 가까이 지켜온 노동자들이 있다. 바로 구미지부 SiL지회 조합원들이다. 구 한국합섬 2공장 정문에 위치한 지회 사무실에서 이정훈 지회장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리에게는 ‘한국합섬HK’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SiL지회의 투쟁은 2006년 회사의 일방적 정리해고로 인해 시작됐다. 4백 명 가까이 되던 파업조합원들이 1백 4명으로 줄어들고, 대리운전 등으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오면서도 그들은 공장을 지켰다. 이 지회장은 “정리해고와 2007년 파산선언 당시 회사는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며 “회사의 분식회계, 횡령, 투자실패 등으로 인한 재정악화 책임을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넘겼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1월13일 구미 에스아이엘지회 간부들과 조합원들이 공장 정상 가동을 기원하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신동준

공장은 결국 작년 7월 (주)스타플렉스가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인수업체가 고용과 노조, 단체협약 등을 승계하면서 조합원들이 지켰던 공장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그리운 일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스타플렉스와의 협상과정도 쉽지만은 않았다. 초기 스타플렉스 측은 ‘자산’만을 인수하기로 했기 때문에 고용 승계 등에 대한 의무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공장에는 무력 침탈까지 예상되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지회가 공장 실사를 계속 저지하며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스타플렉스 측은 결국 지회 요구안을 수용했다.

한국합섬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이정훈 에스아이엘지회장. 신동준
이 지회장에 따르면, 공장은 올 3월쯤 본격적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조합원들은 현재 순차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있으며, 회사는 정상 가동되기 전에 조합원 전원을 복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업무배치를 기다리는 조합원들은 여전히 지회 사무실에 나와 탁구를 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지회장은 “절박한 상황에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했다”며 “하지만 5년이라는 그 힘들었던 시간이 우리를 더 하나로 만들어 준 거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SiL지회에는 걱정 없는 현재와 밝은 미래만 존재할까? 이 지회장은 인수업체인 스타플렉스와의 관계를 ‘수평선’으로 표현한다. 그는 “지금도 계속 긴장 속에 있는데, 무엇보다 스타플렉스에 노조가 없다”며 “노조를 대해본 경험이 없는 회사와 대화를 계속 해나가려니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이어 이 지회장은 함께 돌아오지 못한 3백 여 명의 동료들을 언급했다. 그는 “그들 역시 파업에 함께 했고, 하지만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났다"며 "현재 회사가 끝까지 남은 사람들의 고용승계만을 인정한 상태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들을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지회의 가장 큰 숙원사업이란다.

스타플렉스에는 노조가 없다

그런데 회사가 공장가동에 반드시 필요하다며 한국합섬 시절 일했던 기술직 일부를 공장으로 불러들였다. 이 지회장은 “생산노동자들과 달리 기술직들은 파업에 참여하기는커녕 오히려 파업파괴 역할을 톡톡히 했다”며 “복귀한 조합원들이 그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 때문에 불편해한다”고 내부 사정을 소개했다.

이 지회장에게 지난 5년의 시간에 대해 물었다. 그는 “사람도 많고 싸운 시간도 길어서인지 여러 일들이 있었다”며 지나온 과거를 떠올렸다. “생계 때문에 시골에 농사 품 팔러 간 친구가 있었는데, 일하러 가다가 차가 전복돼 죽었다. 화장하고 뼛가루 뿌리고 오는데 기분이 참….” 이 지회장은 말끝을 흐렸다. 그 세월 지나고 보니 어느새 40대가 되어버린 후배, 투쟁하느라 여전히 미혼인 친구, 이혼한 선배, 아직 공장으로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 살아서는 다시 못 만나는 동지…. 남은 자, 떠난 자, 모두 아직 혼란스럽다.

지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현판들. 아직 HK(한국합섬)지회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신동준
"공장인수 결정되고, 지회를 재정비한 뒤 현장복귀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말이 5년이지, 그 시간동안 조합원들의 심신이 많이 지쳤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투쟁하면서 상처받는 일도 있었지만, 결국 노조가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버텼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노조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믿는다. 승리 후에 들었던 생각은 무엇보다도 역시 노조가 평소에 제대로 역할을 해야 힘든 상황이 생겨도 굳건히 이겨낼 수 있다는 거다. 교육과 선전, 그 뭐 별 영향 있겠냐고 생각하지만, 정말 중요하다. 지나고 보니 개인적으로 후회되는 게 많다.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는 동지들에게 섭섭한 말도 했던 거 같다. 지회에서 그 동지들 잊지 않고 있다. 회사에 꾸준히 그들의 존재를 알릴 것이다"

남은자 떠난자 모두 아직은 혼란

이 지회장은 "그 전에도 많은 연대를 받았지만, 금속노조로 조직전환을 한 다음에 큰 힘을 얻었다"며 금속노조에 대한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는 특히 금속노조의 생계지원과 든든한 후원이 있었기에 끝까지 싸울 수 있었단다. 힘든 투쟁사업장들끼리 서로 주고받았던 연대의 기억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다시 공장이 정상가동되면 부서회식마다 찾아다니며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다는 이 지회장. 그는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이 우리를 보며 희망을 얻길 바란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기륭전자 동지들도 있지만, 5년만에 공장으로 다시 돌아온 사례는 흔치 않다.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을거다. 노조 간부들이 잘 버텨줬고,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고맙다. 투쟁사업장들, 혼자 무거운 짐 다 지려고 하지 말고, 조합원들과 같이 헤쳐나가면 좋겠다. 결국 조합원들이 투쟁의 주체가 돼야 한다. 파업기간동안 노조 간부들이 조합원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고, 그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희망을 갖고 함께 싸우면 된다."

▲ 올 3월 공장이 본격 가동될 예정이다. 신동준

이 지회장과의 인터뷰가 끝날 즈음, 점심시간이 되었고 공장에 복귀한 조합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지회 사무실을 찾은 장병국 조합원은 "첫 월급 받게 될 날만 기다리고 있다"며 "가족 모두가 함께 투쟁한 셈이다. 가족들 고맙고, 첫 월급 받으면 가족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그들의 오랜 ‘동지’들이 모두 공장으로 복귀하고, 뿔뿔이 흩어진 노동조합 노래패가 다시 힘차게 돌아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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