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누구나 한번 쯤 올 1년 어떠했을까 돌아볼 것이다. 한국사회는 어떠했고, 노동운동 아니면 적어도 개인의 삶에서 라도. 올해의 가장 소중한 성과를 꼽는다면? 단연코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1,895일에 걸친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승리라고 본다. 기륭 투쟁은 지난 6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상징으로, 노동운동만이 아닌 일반 사회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이들의 투쟁의 힘에 이끌려 필자 역시 언제부터인지 매일 찾아가는 인터넷 카페가 있는데, 바로 기륭전자분회 사이버 공간이다. 회사가 하는 짓을 보면서 분노하거나 안타까운 상황을 보면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어떻게 저리 ‘질기게’ 잘 싸울 수 있을까하며 가슴 뭉클 하기도 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회사 마음대로 자행되는 일상적인 해고에 맞서 2005년 7월 5일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순식간에 150여 명의 노동자가 조합가입원서를 작성하면서 정규직과 계약직 파견 직이 함께하는 노조가 등장하였다. 조합원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더 이상 해고당하지 않고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노조결성이후 기륭전자는 ‘계약해지’라는 이름으로 계약직, 파견직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해 버렸다. 노조는 억울하게 해고된 비정규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아마 누구도 투쟁이 이렇게 장기간 진행될 줄 몰랐을 것이다.

‘어찌 저리 질기게 싸울 수 있을까’

1895일 동안 기륭 노동자들은 현장점거농성투쟁에서 시작해서, 공장 앞 농성, 단식투쟁, 삭발투쟁, 고공농성, 회장 고향방문투쟁과 회장집 앞 농성, 3보 1배, 1인 시위, 촛불시위와 문화제, 집회 등 그 동안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사력을 다해 투쟁했다. 투쟁 1,000일을 맞아 다시 강도 높은 투쟁을 결의하며 삭발을 하고, 고소공포증이 있던 두 조합원은 울면서 ‘하이서울페스티발’이 벌어지고 있던 시청 앞의 조명탑에서 고공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때 두 명이 한 조가 되어서 탑에 올라갔는데 은미, 석순이는 심각한 고소공포증이 있었는데, 당사자들이 이야기 하지 않아 몰랐다…. 은미는 철탑에 올라가면서 너무 무서워 울면서 ‘비정규 철폐가’를 불렀다고 하고, 석순언니는 철탑에 올라가 앉지도 못하고 내내 서 있었다고 한다. 고소공포증에도 말 한마디 않고 실천한 동지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1,000일 투쟁은 힘차게 전개되었다.” (김소연 글)

▲ 지난달 12일 '기륭의 6년, 골목에서 6년 그 끝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골목축제가 기륭 공장 농성장 앞에서 열렸다. 지금은 철거해 볼 수 없는 기륭전자분회 컨테이너 농성장과 경비실이다. 신동준
94일의 단식농성까지 벌였던 김소연 분회장은 긴 투쟁기간 중 가장 힘들었던 때가 2007년이라고 한다. 기륭노동자의 목숨을 건 투쟁에도 회사는 움직이지 않고, 상급 조직은 이들의 투쟁을 방관하는 모습, 생계에 고통 받는 조합원들의 모습에서, 어떻게 투쟁을 이끌고 나가야 할지 숨이 막혔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가장 힘들었던 때가 2007년이었던 것 같다...힘찬 투쟁도 했지만 문제해결의 진척은 없고, 상급 조직이나 그 어디에서도 적극적으로 함께 투쟁을 만들어가자고 하는 곳이 없었다. 물론 주체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언제인가 답답함이 목까지 차올라 숨 쉴 수도 없을 것 같은 날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그렇게 목 놓아 울어본 적은…. 조합원들은 생계의 어려움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주체의 투쟁에 비해 상급조직의 투쟁 결합은 느슨하고, 어떤 때는 우리의 투쟁제안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어렵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꼈다....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오지 않는 연대 vs 찾아가는 연대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농성장에 앉아서 ‘오지 않는’ 연대를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며 먼저 연대투쟁을 벌여나갔다. 여러 비정규직 노동자투쟁, 광우병촛불시위, 용산투쟁, 쌍용자동차투쟁 등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기륭 노동자들은 같이 했다. 이런 모습은 이들의 투쟁일정표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 6월 29일 화 (투쟁1771일차/농성1717일차)
- 출근투쟁
- 11시30분 파견업종 확대 반대 및 기륭문제해결을 위한 시청앞 선전전(국세청 남대문 별관)
- 13시30분 푸른기술분회 연대집회(코오롱빌란트 앞)
- 15시 하이텍 알씨디코리아 지회 연대집회(독산역 우림라이온스)
- 19시 최저임금 5,180원 쟁취! 전국노동자대회(최저임금위원회 앞)…

* 7월 1일 목 (투쟁1773일차/농성1719일차)
- 출근투쟁
- 10시 파견업종 확대 반대 대책회의 출범 기자회견(광화문 정부종합청사)
- 12시 파견업종 확대 반대 및 기륭문제해결을 위한 대한문 앞 일인시위(시청역)
- 14시 노철연대집회(삼성역 대명종합건설)
- 16시 기륭전자분회 연대집회(신대방사옥)
- 19시 동희오토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앞 촛불문화제(양재동)
- 19시30분 강남촛불 2주년 기념 문화제(강남역)…

이런 연대투쟁은 결국 노동자들은 물론 대학생들, 촛불시민, 종교인, 문화예술인, 정치인들까지 기륭 전자 노동자들의 농성장에 발길을 하도록 만들었다. 또 2007년 기륭전자, 이랜드, KTX 등 여성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변화한 것은 기륭전자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정규직화라는 목표를 넘어 이 사회에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바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기륭 노동자들이 장기간 투쟁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김소연 분회장은 성실한 일상투쟁의 전개와 항상 조합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마음을 모아가며 투쟁한 것에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어떻게 그렇게 질기게 싸울 수 있냐, 그 힘이 어디서 나오냐?’고 묻는다. 우리는 ‘일상투쟁을 꼼꼼히 해온 것이 그 힘이다’고 답해 왔는데, 다큐를 찍는 감독은 ‘우리의 수다’에 그 힘이 있다고 한다. 사실 우리 농성장은 늘 시끌벅적하다. 별것 아닌 얘기도 서로 목청 높여 목숨 걸고 얘기한다.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몇 사람 안 되면서도... 어떤 동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수다로 적들을 교란시키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고도 한다.”

수다로 적들을 교란시키다?

결국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2010년 11월 1일 회사 측과의 협상으로 노동자들의 승리로 정리되었다. 물론 회사 측이 약속을 지키도록 강제하는 일이 남았지만. 이들이 투쟁하는 6년 동안 전국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 했을 것이다. 기륭 농성장을 방문한 충청북도의 노동자들은 투쟁과정을 직접 들으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들의 투쟁은 ‘잊혀진’ 노동운동의 정신을 확인시켜 주고 노동운동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투쟁 주체들이 포기하지 않은 한, 힘들고 오래 걸려도 투쟁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또한 연대의 분위기가 수그러진 정규직 노동운동을 연대로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투쟁 주체들이 먼저 지속적인 연대활동을 벌여나가야 한다는 현실을 보여 주었다. 연대 투쟁의 과정에서 투쟁 주체들이 먼저 변화하였다. 즉 이들은 사업장 문제에서 나아가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주장하면서, 그 투쟁의 선봉으로 나선 것이다. 그 결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사회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였고,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침체’되어 꺼져가는 노동운동의 불씨를 되살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제 노동운동은 기륭전자 노동자들을 비롯한 생존을 위협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주도해 나가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투쟁목표가 ‘정규직화’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정규직화의 요구가 현실적인 절박한 요구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자리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 사회를 뒤집는 큰 방향을 가져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침묵에 경종을 울려, 2011년에는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노동해방을 꿈꾸며 어깨 걸고 나아가는 변화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유경순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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