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지식경제부와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1992년 반도체 수출 100억 달러 돌파를 축하하며 만든 ‘반도체의 날’ 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비전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 날 축제는 ‘그들만의’ 축제였다. 반도체 수출 100억 달러를 만든 노동자들은 그 순간에도 백혈병, 뇌종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 29일 축제장 밖에서 “피로 물든 반도체의 날 축제를 멈춰야 한다”고 외쳤던 반올림 장안석(‘건강한 노동세상’ 사무국장) 활동가를 만났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아래 반올림)’은 2007년 11월20일 발족했다. 첫 시작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故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였다. 건강하던 딸이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병에 걸렸고 2007년 3월 세상을 떠났다. 같은 공장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도 비슷한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산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삼성은 자신들과 상관없다 발뺌하며 5백만 원으로 정리하자고 했다. 한나라당도 찾아가고 언론도 쫓아다니며 항의했다.

▲ 지난 7월23일 서울역 광장에서 삼성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는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반올림(http://cafe.daum.net/samsunglabor).
“이것은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자산업 전체 노동자의 문제다” 이 생각에 동의한 노동안전 활동가와 단체가 모여 반올림이 탄생했다. 활동을 하면서 故황유미씨 외에도 많은 피해자가 나타났다. 만 3년의 활동 기간 동안 삼성에서 일하다 병들고 죽어간 1백 여 명의 노동자를 만났다. 처음에는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사람들의 제보가 들어왔지만, 나중에는 LCD, 핸드폰, 전기사업부 등 삼성 곳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각종 희귀암과 뇌종양 등 다양한 병을 호소했다. 현재까지 16명이 산재신청을 했지만 심사가 끝난 10명 모두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그 중 5명이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반도체 지키느라 노동자 인권은 저멀리

장안석 사무국장을 비롯한 반올림 회원들은 제보가 들어온 피해자를 만나느라 늘 바쁘다. 그들을 만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삼성의 작업환경이 얼마나 끔찍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현장에서는 예민한 반도체를 다루다보니까 수 백 개 되는 화학물질을 사용해요. 하지만 얘기 들어보면 안전교육을 받은 사람도 없고, 마스크나 장갑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고 있죠” 지난 5월 ‘한겨례 21’에서는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 엔지니어들이 가지고 있는 환경수첩을 입수, 공개했다. 이 수첩은 회사가 지급한 것으로 안에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적혀 있는데, 이 중 6개가 발암물질로 판명됐다.

▲ 10월29일 반올림이 지식경제부와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주최한 '반도체의 날' 행사를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반올림(http://cafe.daum.net/samsunglabor).
“이 뿐만이 아니예요. 청결한 클린룸 유지하려고 먼지 하나까지 차단해야 하니까 공장 안에는 화장실도 없어요. 출구도 하나 뿐이라 화장실 한 번 가려면 옷을 갈아입고 에어샤워를 하고 건물 밖으로 나가서 가야 하는데, 가고 싶을 때 화장실 제대로 갈 수 있겠어요?” 노동자들은 잔업까지 12시간씩 일하고 맞교대를 한다. 하지만 회사가 기숙사에 일하는 조가 다른 사람들을 배정하다보니 늘 보는 건 같은 방 쓰는 사람의 자는 얼굴 뿐이다. “기본적 생리조건 조차 충족이 안되고 최소한의 인간적 소통 관계를 막는 삼성의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죠” 반올림 투쟁은 삼성 노동자의 건강만이 아니라 노동조건,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방패막 없는 현실

피해자 가족들은 증언대회 자리에서 “삼성에는 노조가 없습니다. 병들어도 얘기할 곳도 없고 잘못된 것도 얘기할 수 없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장 국장이 일하고 있는 단체는 인천 지역에서 산재 상담을 한다. 상담 요청의 70%가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다. “노조가 없는 곳에서는 산재 사고가 일어나면 개인이 회사를 상대로 해서 싸움을 해야돼요. 그러다 보니 많은 노동자들이 결국 포기하죠”

노조는 내가 일하고 있는 작업 환경에 문제가 있으면 변경을 요구하고 다쳤을 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회사에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패막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노동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병들고, 병든 뒤에는 회사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도 삼성 공장 앞에 가서 선전전을 하면 꼭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해요. 쉽지는 않겠지만요” 반올림은 노조가 없는 것을 ‘신화’라고 까지 얘기하는 삼성을 상대로 싸움을 하고 있다. 나와 가족, 그리고 아직도 끔찍한 현장에서 일하며 병들어가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말이다.

노동조합 있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장 국장은 “노동조합이 생기는 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즘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 가 봐도 잘못된 설비나 위험한 물질도 많아요. 실제 노동자들이 자기 일터나 생활이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 걸 느끼기 어려운 경우가 많죠” 지금 있는 산업안전보건법만 잘 지켜도 일터를 안전하게 바꿀 수 있는 게 많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노동조합이 있든 없든 많은 노동자들이 일하다 다치고 죽고 있다.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안석 건강한 노동세상 사무국장.
“하청노동자랑 정규직 노동자가 같이 일하는 공장에 간 적이 있어요. 정규직 노동자가 노조 조끼를 입고 같이 돌아다녔는데 그 옆에서 하청노동자는 화학물질에 그냥 노출된 채로 일하고 있었거든요. 노동조합은 전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말만이 아니라 실제 노동자들 일하는 현장 하나 바꾸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거든요” 노동조합이라면 같은 공장에 있지만 더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는 노동자, 공장 밖에서 직업병을 인정받기 위해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

장 국장은 그래서 더욱 반올림 투쟁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정말 열심히 싸워서 행정소송에서 이기면 삼성의 문제가 그대로 증명될거예요. 직업성 암도 인정받고, 산재신청을 불승인한 근로복지공단과 질병판정위원회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사회적 논란도 될 수 있어요. 산업안전보건법이라는 최소한의 테두리가 있는데도 노동부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밝혀질거구요” 그리고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이라는 것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법 제도를 개선하는 커다란 움직임을 만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싸움은 삼성만을 상대로 한 싸움이 아니다. 전체 노동자의 건강권이 걸렸다”고 얘기한다.

전체 노동자 건강권 걸린 싸움

그 투쟁에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무엇을 해야 할까. “소소하지만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에게 반올림 투쟁 내용을 담은 선전물 한 장씩 돌려서 알리는 게 중요해요” 반올림과 조합원 간담회를 할 수도 있고, 교육을 할 수도 있다. “반올림 투쟁을 계기로 정말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전체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건강과 안전, 그리고 노동기본권과 인권에 대한 얘기까지요”

반올림은 11월 또 다른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11월25일 행정소송 공개재판이 열린다. 그 자리에서 삼성은 노동자들이 아픈 것이 개인질환일 뿐이라는 걸 증명하려고 무던히 애를 쓸 것이다. 반올림은 그런 삼성에 맞서 전자 산업 노동자들의 현실이 어떤지, 왜 수많은 노동자들이 같은 공장에서 똑같이 병들고 죽어가는지 알리기 위한 사회적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어디 삼성만의 문제겠는가. 말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노동자, 언제 다치고 병들지 모른 채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처음 한 노동자의 죽음에 분노해 시작한 싸움이 이제는 1백 명이 넘는 노동자와 가족들을 모이게 만들었다. 이제는 그 투쟁을 하는 ‘반올림’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지 생각하고 행동에 나설 때다.

*반올림 카페 : http://cafe.daum.net/samsungla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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