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회사 입구가 어딘가요?” 전남 나주에 있는 한국쓰리엠공장을 찾았다. 정문 앞에 세워진 한국쓰리엠지회 천막농성장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펜스가 길게 쳐져 있고 당연한 듯 용역도 한 명 서있다. 그런데 그가 있는 자리가 회사 입구가 아니란다. 저 멀리 3개의 펜스를 지나 입구가 보인다. 아까운 정문 앞 길을 공터로 비워두고 천막농성장을 차도 앞까지 쫓겨나게 만든 3중 펜스. 회사 작품이다.

천막농성장을 설치하면 밀고, 또 설치하면 밀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펜스만 3개가 쳐졌다. 옛 정문 앞 나무는 가지가 다 잘려나갔다. ‘이쑤시개’ 같아 보인다. 조합원들이 천막농성장 치고 그늘 생긴다고 회사가 잘라버렸단다.

▲ 한국쓰리엠지회 김관규 조합원이 회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당한 탄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매일이 전쟁입니다. 전쟁”. 김희봉 지회 사무장은 손가락이 부러져 붕대를 감고 있고, 무릎 연골을 다쳐 걷는 폼이 불안정하다. 병원에 입원했다 나오는 길이라 꼴이 말이 아니다. 이날은 나주 공장이 잠잠하다 했더니 오전 경기도 화성 공장에서 또 용역과의 마찰이 있었다 한다. 휴대폰으로 동영상 찍던 여성조합원들을 용역들이 밀치고 발로 밟았다. 결국 30여 명이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렇게 한국쓰리엠 공장은 매일 매일이 전쟁터다.

이곳은 매일매일 전쟁터

그래도 정문 앞 천막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조합원들이 많다. 이날은 저녁 문화제를 준비하느라 바쁜 모습이다. 금속노조에 가입한 지 1년 3개월. 노동탄압 종합선물세트라는 악명 높은 한국쓰리엠에서 왜 그렇게도 노동조합을 지키겠다는걸까. 26일 나주공장 앞 천막에서 김 사무장과 김관규 조합원을 만나 그 사연을 들어봤다.

금속노조 가입 전 한국쓰리엠 공장은 상식 밖의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1년에 한 켤레씩 지급되게 돼 있는 안전화는 3년이 지나도록 안 나왔다. “저도 똑같은 안전화를 3년째 신었어요. 작업복도 회사가 안바꿔주니 자기 돈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고...” 이런 일이 비일비재 했다고 김 조합원은 전한다.

통근버스도 문제. 생산직은 3교대 근무를 한다. 통근버스가 있기는 하지만 사무직 패턴에만 맞춰 운행된다고 한다. 나주공장에는 광주에 살고 있는 노동자들이 많지만 광주로 운행하는 통근버스는 없다. “이건 꼭 좀 써주세요. 그렇게 잘나가는 한국쓰리엠이라는 회사가 통근버스도 제대로 운행안한다고 하면 다들 웃어요”.  

▲ 한국쓰리엠 나주 공장에는 3중 펜스가 쳐져있다. 지회에서 설치한 천막을 철거하면서 펜스도 같이 늘어났다.
상식 밖 행동의 최고는 바로 '개인 근무평가 제도'. “내 윗 상사가 나를 평가합니다. 그리고 임금 인상률을 평가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거죠. 임금 기본 액수는 정해져 있지만 같은 부서 같은 연차 직원들도 매 년 인상률이 달라져요”. 김 사무장은 11년차 입사 동기와 임금이 20만원까지 차이가 난다고 덧붙인다. 한 달에 20만원, 1년이면 2백 4십만원이라는 돈 앞에 노동자들은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한 부서 팀장 부인이 화장품 사업 시작하면 직원들에게 화장품 판매도 종용한다고 한다. 6만원 짜리 다이어리도 하나씩 사야 한다. 만약 사지 않으면 암암리에 평가에 반영된다.

직장상사 부인 화장품 사업까지 거들다?

“산재나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마이너스(-) 평가예요” 산재신청은 꿈도 꿀 수 없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개인 잘못인데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이 더 일해야 한다고 평가를 나쁘게 한다. “회사에서 다친 것도 집에서 종이에 긁혔다는 식으로 숨겨요. 병원비 14만원 때문에 20만원씩 차이나는 임금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당연히 산재신청 안해야 되는거죠”.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 않는 한 최대한 감춰야 한다,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는. 이렇게 임금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조합원끼리는 서로 알아서는 안되는게 황당한 ‘취업규칙’이다. 개인정보를 서로 알면 안 되고, 회사 경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이유.

▲ 지회 확대간부들이 천막에 모여 촛불문화제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왔으니 노조 만드는 건 당연했다. 4천억원 순이익에도 임금은 삭감됐고 구조조정은 계속됐다. 여전히 안전화는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2009년 5월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한층 강화된 탄압의 연속이다. “아유, 말하자면 끝도 없어요” 들어보니 정말 끝도 없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서 이동이다. “이리가, 저리가” 팀장 한 마디에 부서를 옮겨야 한다. 방식은 간단하다. 회사에서 소문난 '3D' 업무에 있던 비조합원들을 빼고 조합원들을 그 업무에 배정하는 것. 이 회사 안에서 한 공정을 익히는 데 적어도 2~3년의 시간이 걸리는데도 하루 아침에도 부서가 바뀐다.

회사탄압 "아유, 말하자면 끝도 없어요"

김 사무장이 한 여성 조합원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 조합원은 혈액에 문제가 있어 힘든 일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산업 간호사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QC(검사)업무를 맡아 잘 해왔다. 그런데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회사는 돌가루가 날리고 '클린복'을 입고 일해야 하는 곳으로 부서 이동을 지시했다. 조합원은 일하던 공정에는 비조합원이 배치됐다. 자신은 몸이 좋지 않아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얘기하자 회사는 검진을 받아오라고 했다. 검진 결과를 가져오니 그럼 병가를 쓰란다. 병가를 쓰지 않았더니 ‘업무지시 불이행’이라고 징계를 내렸다.

김 조합원은 부서 이동을 당하지 않았을까? 김 조합원은 할 말 좀 했다는 이유로 노조 건설 전에 이미 5차례 부서 이동 당했다. 결국 지금 회사에서 가장 힘들다고 소문난 이른바 '기피부서'에 있다고 한다. “최악의 부서로 보내고 싶은데 이미 바닥이라 더 갈데가 없어요” 그런데 그 부서에 새 식구가 늘어나고 있다. 회사가 지회 간부들을 김 조합원이 있는 부서로 배치하고 있는 것. 그러면서 회사는 연차 높은 간부들 때문에 인건비 늘어나고 생산단가 높아져서 적자라는 얘기를 흘리고 있다. 설비를 뺀다느니 부서를 없앤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들린다. “대놓고 노조탈퇴하라고 하는 거죠 뭐”

▲ 조합원들의 가족들도 촛불문화제를 함께했다.
조합원들이 당한 징계를 다 합치면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기본이 정직 3개월~6개월이라고 하니 말 다했다. 김 조합원은 감봉 3개월을 당했다. 이유를 말하면서 지금도 어이가 없는지 웃는다. “파트장이 전화로 업무지시를 했다는데 내 직속상관은 조장이니까 거기에 물어보겠다고 했다고 감봉 3개월이라네요” 이해하기 힘들지만 노조설립 뒤 조합원들이 숱하게 겪고 있는 일이다.

뭐 말 만하면 정직에 감봉

회사는 가족들까지 회유하고 있다. 부모님을 찾아가 “당신 자식 때문에 회사가 망해갑니다. 노동조합 때문에 회사가 망해요”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는 나주에서 과수원을 하는 부모님에게 나주배를 선물이라고 사가고 여수에서 돌김 양식을 하는 부모님에게는 돌김을 사갔다 한다. 때문에 조합원들이 웃고 말았다 한다.

이런 탄압 이곳 조합원들이 버틸 수 있는 힘은 뭘까. 억눌렸던 것의 표출. 그것만으로도 이들은 노조가 있어 살 맛 난다고 얘기한다. “집에서나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억눌렸던게 있는거죠. 그동안 말 하지 못했던 걸 상사들한테 얘기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 좋아하구요” 김 사무장은 조합원들의 생활 자체가 많이 변했다고 얘기한다. 일하고 돈 받고 집에 가는 것 밖에 모르던 이들이 법적으로 잘못된 것도 알게 되고, 나를 위해 같이 하는 사람들도 알게 됐다.

언제부턴가 회사는 "금속노조만 아니면 모든 걸 들어준다"고 하기 시작했다지만 이곳 조합원들이 금속노조에 가지는 자부심은 대단했다. “서울 상경투쟁 갔을 때 느낀건데요, 금속노조 조끼만 입고 있으면 어디 가서든 밥은 먹을 수 있고, 커피 한 잔은 마실 수 있겠더라구요” 지금 정문 앞에 있는 천막 3동 중 하나는 광주전남지부(지부장 장영렬)가 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만의 기업별 노조였으면 이렇게 징계당하고 힘든데 어떻게 버텼겠어요. 정말 같이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느낄 때가 힘이 많이 되죠” 조합원들에게 금속노조는 또 하나의 가족이 된 셈이다.

진짜 가족들은 어떨까. 매일같이 집에 못 들어가고, 파업에 징계에 집에 가져가는 월급은 줄었다. 김 사무장은 가족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워낙 조용한 시골동네라 머리띠매고 조끼 입고 투쟁 투쟁 하는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거예요. 특히 집에서 잘 하던 사람들이 지금 노조 일도 열심히 하거든요. 애들은 예전의 아빠 모습을 그리워 하죠”

"같이하는 사람들 있다는 걸 느낄 때가 큰 힘"

이곳 지회 간부들은 평일 대부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농성장을 지킨다. 저녁 9시쯤 되면 자리에 누워있지 않고 곳곳에 흩어져서 전화를 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아이들과 하는 통화. 전쟁 같은 싸움을 매일같이 하는 조합원이지만 아이들과 통화할 때면 목소리가 한껏 부드러워진다. “부인하고는 차라리 싸우기도하고 이해를 시키겠는데 아이들은 이해시킬 수가 없어요. ‘아빠 보고싶어, 왜 안놀아줘’ 이렇게 얘기하는데 너무 어렵죠” 김 사무장은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하는 모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한다.

▲ 26일 저녁 나주의 한 공원에서 가족, 시민과 함께하는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촛불로 '3M지회'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김 조합원은 두 아이의 아버지다. 7년 동안 전업주부였던 부인은 7개월 전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김 조합원을 원망하지 않는다 한다. 노조를 처음 만든다고 했을 때 회사가 돈을 많이 벌면서도 터무니없는 짓을 많이 한다면서 오히려 기뻐해줬다. “제가 집에 백지수표를 좀 많이 날렸어요. 투쟁 승리하기만 하면 전국 일주도 시켜주고 비싼 옷도 사주겠다고. 꼭 지켜야죠”

"회사는 우리가 고상한 국화꽃인 줄 알아요. 꽃 송이만 잘라내면 끝나는 줄 알죠. 근데 우리는 들풀이거든요. 밟으면 밟을수록 강해지고 뿌리는 넓게 뻗치는...” 회사는 지금 있는 천막농성장마저 용역 2백 명을 동원해 치워버리겠다는 얘기를 흘리고 있다. 그런데 김 사무장을 비롯한 조합원들은 오히려 할테면 해보라는 각오다. “탄압하면 할수록 더 성숙해지고 있어요. 이번에 천막 치워버리면 다시 멋지게 치면 되죠”

김 조합원도 '승리'를 당연한 거라 얘기한다. “온갖 짓을 다하는데도 이렇게 많은 수가 남아 노조를 지키고 있는데 이길 수밖에 없죠. 회사가 그럴수록 오히려 악 밖에 안남습니다. 젊음도 있고, 패기도 있고 꼭 이길거예요”

"천막 털리면 또 치죠 뭐"

26일 저녁 8시, 지회는 나주의 한 공원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문화제를 열었다. 주변의 시민들, 공원을 산책하던 주민들이 ‘뭐 하는 거냐’ 물으면서 준비된 자리에 앉는다. 조합원들 가족들도 많이 찾아왔다. 대부분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은 어린 나이다. 문화제 준비하느라 바쁜 조합원들이 가족들이 오면 한걸음에 달려가서 아이도 안아보고 오랜만에 인사를 나눈다.

▲ 노조 김형우 부위원장도 문화제에 참석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 박수를 받았다.
이 날 문화제는 어느 때보다 흥겹다. 조합원이 직접 기타를 매고 나와 노래도 부르고, 급조된 노래공연 ‘여행을 떠나요’도 호응이 좋다. 지회 율동패, 풍물패도 멋진 공연을 선보인다. 문화제에 참석한 금속노조 김형우 부위원장도 지회 조합원들에게 힘을 주겠다며 기타를 매고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도 신이 나서 박수를 친다. ‘투쟁하는 우리가 금속노조입니다’ 문화제 뒤 걸개에 적힌 말이다. 투쟁하는 한국쓰리엠지회 조합원들이 바로 금속노조다. 이들의 승리가 멀지 않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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