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이하 한노보연)는 ‘중대재해 근절과 작업중지권 실현을 위한 당장멈춰팀’(이하 당장멈춰)을 구성해 작업중지권 복원을 위한 실태연구와 이론 축적 등의 사업을 진행한다. 한노보연은 올 하반기 노조 노동안전보건실의 협조를 얻어 금속노조 사업장의 작업중지권 실행 경험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작업중지권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고찰, 작업중지권 복원과 확장에 대한 한노보연 당장멈춰팀의 기획 연재를 열 차례에 걸쳐 싣는다.

<연재 기획>

① 작업중지권이 일상인 현장, 어떻게 활용하고 지켜나고 있는가.

② 노동자의 안녕을 위한 권리 구성

③ 징계 및 손배로 작업중지권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사업장

④ 작업중지권의 법리적 쟁점

⑤ 임금 손실로 직결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⑥ 현행 산업안전보건법 26조 ‘작업중지권’ 의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과제

⑦ ‘위험’이란 무엇인가, ‘급박한 위험’이란 무엇인가.

⑧ 해외의 작업중지권 사례 비교

⑨ 작업중지권의 확장 : 유해위험작업중지권, 작업거부권, 작업거절권, 작업회피권

⑩ 현장의 조직력 강화 측면에서의 작업중지권

산업안전보건법(아래 산안법)에서 규정하는 작업중지권을 행사하기에는 법률적으로 여전히 미비하고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물론 법은 더욱 더 노동자의 입장에서 개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장에서 작업중지와 거부를 어떠한 입장에서 바라보고 실현하고자 하는가이다. 이에 대해서 하나의 사례를 통해 함께 고민해보자.

엔진 이송기에 쇠사슬이 끊어지면서 300kg에 달하는 엔진이 바닥에 떨어졌다. 천만 다행으로 그 아래에는 작업자가 없었다. 사측의 관리자는 떨어진 엔진을 치우고 노사 합의 없이, 납득할 만한 별다른 조치도 없이 작업을 재개하려 한다. 이때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가? 아닌가? 다치거나 죽은 자가 없으니 이를 안전사고라 할 수 있는가? 아닌가? 이 사고 상황에서 산안법 제26조에서 정한 ‘작업중지’는 가능한 것인가?

사고는 지난 1월16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 발생했다. 사고발생 이후 라인 재가동과 이를 저지하려는 다툼 와중에 사측의 5백 여 명에 달하는 구사대와 1천 여 명의 조합원 간에 물리적 충돌까지 일어났다.

다치거나 죽어야 안전사고인가?

이러한 양상으로 치닫는 싸움의 배경은 안전사고에 대한 사측과 노측의 근본적인 해석과 대처에서의 분명한 차이 때문이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는데 이를 안전사고라고 볼 수 없고, 안전과 생명보다는 라인을 돌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 기본적인 사측의 태도이다. 사람이 죽거나 다쳐야만 안전사고라는 인식과 안전을 무시하고 생산을 우선하는 발상이다. 이러한 회사의 사고방식이 바로 안전한 노동자의 삶에 대한 위협이라는 것이 노동조합의 기본 태도이다.

함께 생각해보자.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기에 안전사고가 아닌가? 안전이란 ‘위험이 생기거나 사고가 날 염려가 없이 편안하고 온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사고란 ‘뜻밖에 갑자기 일어난 좋지 않은 일’을 말한다. 그렇다면 안전사고란 염려가 생기고 편안하고 온전한 상태를 위협하거나 방해하는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사가 발생해야만 사고가 아니라는 뜻이다.

육중한 엔진이 작업장에서 추락한 사태는 그야말로 편안하고 온전한 상태를 위협하는 안전사고다. 그렇다면 사고의 원인을 정확히 규명해야 한다. 원인 규명과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는 상태애서 300kg에 달하는 엔진이 작업자 머리 위로 다시 움직인다면 이를 산안법에서 규정하는 ‘급박한 위험’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회사가 원인규명과 재발방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라인을 가동한다면 그 아래에서 일하는 작업자는 세상 어느 노동자보다 불안하고 가장 큰 위험에 놓여있는 것이다.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작업자는 위험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해당 작업자에게는 무엇보다도 가장 급박한 위험인 것이다.

▲ 엔진 이송기 쇠사슬이 끊어지면서 300kg에 달하는 엔진이 바닥에 떨어졌다. 천만 다행으로 그 아래에는 작업자가 없었다. 사측의 관리자는 떨어진 엔진을 치우고 노사 합의 없이, 납득할 만한 별다른 조치도 없이 작업을 재개하려 했다. 사고는 지난 1월16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 발생했다. 사고발생 이후 라인 재가동과 이를 저지하려는 와중에 사측의 5백 여 명에 달하는 구사대와 1천 여 명의 조합원 간에 물리적 충돌까지 일어났다. <자료사진>

‘급박한 위험’을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작업자의 주관적, 상대적 기준으로 판단해야 그 효용을 발휘할 수 있다. 만일 이를 부정한다면 산안법은 물론 사업장의 안전예방을 강조하는 숱한 방안과 구호는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급박한 위험’ 작업자 기준에서 판단해야

따라서 작업자가 대피 및 거부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너무나도 정당하고 안전을 지키는 최우선의 방법이다. 앞선 연재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시피 산안법 제26조에는 작업자가 대피하고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 즉 ‘급박한 위험’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를 구체적으로 명시할 경우 작업자가 느끼는 위험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급박한 위험’의 ‘급박한’이라는 표현에 대한 분쟁이 있을 수 있다. 이를 좀 더 포괄적으로 개정하자는 목소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작업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대피와 거부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논리와 사고가 어찌된 일인지 투쟁하는 노동자만 납득하는 형세다. 이 사회에서 생산과 이윤의 가치는 생명의 상식마저도 무시한다. 앞서 예로 든 사례는 크게 두 가지의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우선 첫째, 노동자의 상식이 자본의 상식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전사고가 나면 당연히 이에 대한 원인규명과 대책을 노사가 납득한 뒤에 작업을 재개해야 안전한 작업장을 구현할 수 있다는 상식과 생산에 차질을 주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자본의 상식이 부딪히고 있다.

그렇다. 상식 또한 계급적이다. 누구나 수긍하는 상식은 자본의 계급적 이해 앞에서 초라해지고 왜곡되기까지 한다. 상상해보자. 만일 이 문제와 관련한 TV 토론회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사람도 안 다쳤다는데 너무 과하다”, “배부른 대기업 노조의 횡포다”, “원인규명 안전대책도 중요하지만 생산을 멈추면 안 된다”, “노사합의로 라인가동을 정하는 것은 사용자의 경영권 침해다”, “작업중지권과 관계도 없고, 관계가 있어서도 안 된다”라는 의견이 만만치 않게 지지를 받을 것이다. 심지어 일반 시민이라 자처하는 노동자로부터 이러한 주장을 들을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상상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만큼 자본의 이윤과 생산 중심논리가 대중에게, 심지어 노동조합 조합원에게도 알게 모르게 심어져 있다. 따라서 노동자의 논리와 기준을 쉼없이 개발하고 주장하고 퍼뜨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안전과 생명 vs 생산과 이윤

두 번째 시사점은 이러한 안전사고, 작업거부, 작업중지의 문제가 노사의 집단적 문제가 될 수 있고, 작업장에서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위 사례와 같은 일은 비단 해당 공장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즉 다른 여러 사업장에서 설치물 또는 자재, 부품이 인명의 피해 없이 추락, 전도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 가에 따라 전혀 다른 현장구도를 만들게 된다.

문제가 된 자재를 치우고 끝낼지 아니면 이에 대한 원인규명과 대책을 만든 이후에 작업에 임할 지는 매우 다른 태도다. 산안법 규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했건, 해당 사업장의 노사합의규정을 제대로 적용했건 간에 적극적인 태도로 규정을 사문화하지 않고, 현장 동력을 통해 집단적으로 현실적인 작업중지를 한다는 것은 주목할 지점이다. 노동자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것 뿐 아니라, 노동자의 상식이 무엇인지 조합원에게 환기시키고 현실화해 현장의 통제력을 노동자의 것으로 만드는 하나의 과정이 될 것이다.

다시 확인하건데 산안법의 작업중지에 관한 사항이 여전히 법적 미비 사항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현장에서 작업중지를 시도하지 않거나 노사간의 투쟁으로 확대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법제도는 노동자의 기준으로 해석하고, 현실에서 그 문제를 요구와 투쟁으로 쟁점화해야 한다. 그것이 법제도를 바라보는 노동자의 기본 태도여야 한다.

그렇다. 해답은 현장의 투쟁력이다. 현장이 위축되면 미비한 법제도가 더욱 더 아쉬울 수밖에 없다. 현장이 자신감을 가지면 법제도는 우리가 활용하는 도구이고, 2차적 고려 대상일 뿐이다.

법문에 갇힌 작업중지권이 아닌 노동자의 필요와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살아 숨 쉬는 현장의 작업중지권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의 논리를 개발하자. 작업중지가 개별의 용기가 아니라, 현장의 일상 활동으로 자리 잡기 위해 집단적인 대응을 모색하자. 이를 통해 법제도의 한계를 보란 듯이 유쾌하게 극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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