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드라마가 막장에 막장으로 치달아 갈등과 뒤엉킴은 끝이 보이지 않고, 시청자들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즈음 덜컥 등장하는 대사다. 또는 화목하고 건전하기 그지없어 지루함이 솔솔 피어나오다 급기야 시청율의 급전직하가 우려되는 가족 드라마가 대반전을 도모할 때도 등장하는 대사다.

백혈병이나 뇌종양, 온몸으로 전이된 위암, 췌장암이나 폐암 말기라야 한다. 그래야 온통 뒤얽힌 갈등과 반목이 한 치의 성찰도 없이 사그라져도 우겨볼만 하다. 명랑 드라마에서 신파로 급선회하여 무조건적 가족애를 선동해도 될 만한 병들이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 건강한 당신에게 너무 도발적인 것인가? 사실 필자도 호흡곤란으로 중환자실을 몇 번 왔다 갔다 한 노년의 중증 진폐증 환자들 말고 이런 질문을 받아 본 경험이 없다. 그럼 도대체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언론들은 매년 이맘때 쯤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한국인의 평균수명에 대한 기사를 보도한다. 올해 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성은 77.2세, 여성은 84.1세다. 평균수명은 그 해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평균적으로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예측치, 즉 ‘기대여명’이다. 자료를 좀 더 들여다보면 2010년에 태어난 남자아이의 기대여명은 77.2년으로 이것이 흔히 말하는 2010년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40세인 사람의 경우 기대여명이 38.6년으로 평균 78.6세까지 살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 <자료:기획재정부>
그렇다면 막 태어난 아이보다 지금 40세인 사람이 평균수명이 왜 더 길까? 얼핏 보면 헷갈리지만, 어리거나 젊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여러 고비를 넘기고 마흔살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여러모로 건강이 입증됐기 때문에 기대여명이 더 길다. 이런 이유로 2010년 기준 예순 살인 한국 남성은 앞으로 21.1년을 더 살 것을 기대하고 있어서 82.1세까지는 평균적으로 살아남게 된다는 말이다.

평균수명 남성 77.2세 여성 84.1세

자, 통계치가 이렇고 그 뜻은 이러한데, 정작 지금 큰 건강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남은 생을 제대로 짚어보고 준비하는 일이 쉽지 않다. 꼭 암이나 불치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3~4년 뒤나 10년 정도의 미래라면 준비해야할 것, 챙겨야 할 것을 따지고 설계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마흔 살의 노동자에게 38.6년의 남은 생을 설계하는 것은 골이 무겁고 지끈거리는 문제다. 요즘 세상에 건강한 몸뚱아리 하나, 그동안 이모저모 경험치를 높여 놓은 직업상 몇 가지 요령과 기술, 이리저리 아끼고 눈치껏 투자해서 전세든 내 집이든 장만한 집 한 칸으로 38.6년을 혼자 살기도 힘들다. 두 어깨에 기댄 가족들이라도 있는 경우에는 더욱 만만찮은 세월이다.

자신에게 평균적으로 주어진 여명을 맞이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몸이야 망가지든 말든 일할 수 있을 때 한껏 벌어놓고 모아놓아야 이 지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실 것만 같은 이들도 있을 것이며, 기껏 해 봐야 확률에 불과한 평균수명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하고픈 대로 호기롭게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오로지 건강을 챙기려고 먹고 달리고 오르고 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남는 것 하나. 길든 짧든 아직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마치 아주 공평한 듯 통계학적으로 제시되는 평균수명이 문제가 아니라,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일상 생활의 시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문제다.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에서 건강을 지키지 못하고, 설령 일터에서 건강을 유지했더라도 일터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현실에서 평균수명이니, 기대여명이니 하는 것은 한낱 통계 놀음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순간, 너무 늦다. 지금부터다. 몇 년 남았는가? 같이 나눌 이야기들이 많다.

류현철 / 녹색병원 산업의학과장

* 필자소개 : 현재 녹색병원 의사로 일하고 있다.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일도 함께 하면서 금속노조와 함께 현장 작업환경 및 노동자 노동안전보건에 대해 다양하게 자문을 해주고 있기도 하다. 필자가 작업현장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금속노조 조합원들에게 노동자 건강을 둘러싼 각종 이야기를 연재하여 전해준다. 이번 첫 글을 앞으로 연재될 칼럼글을 안내해주는 성격의 내용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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