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하반기부터 정권과 자본은 정리해고 요건완화와 노동유연화를 내밀면서 한편에서는 민주노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996~7년 날치기로 노동악법을 통과시켜 노동유연화와 정리해고 완화를 법제화시켰다. 민주노총은 총파업으로 그 법집행을 2년 유예 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1998년 2월 6일 2년간 유예되었던 정리해고제를 조기에 받아들이는 노사정 합의안에 동의했다.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직권조인’된 노사정 합의안을 부결시키고, 2월 13, 14일에 총파업할 것을 결정했으나, 2월 12일 8시간의 회의 끝에 다시 총파업을 철회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로 전국 투쟁전선이 무너지고 2월 14일 임시국회에서 유예조항이 삭제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통과되자, 자본은 거칠 것 없이 공세를 가했다. 사업장 단위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어왔다.

구조조정의 칼바람과 36일의 총파업투쟁

그 최전선에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서 있었다.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실제로는 1997년 11월 시작되어 1998년 8월 24일까지 진행되었고, 7월 20일부터 8월 24일까지 본격적인 파업투쟁을 벌이면서 노조집행부가 정리해고를 수용하기까지 9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투쟁 과정에서 정리해고 문제를 첨예한 사회 문제로 부각시키면서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리전’의 성격을 띠었다.

현대자동차는 전 공장에 걸쳐 잔업이 축소되는 것을 시작으로 회사는 4월 17일부터 1차 희망퇴직을 모집하더니 7월 23일부터 마지막 5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사람은 모두 8천여 명이 넘었다. 그 사이 민주노총은 5월 27일 1차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6월 2차 총파업을 선언했으나 철회했다. 금속연맹 차원의 총파업도 잠시 진행되었으나 지도부의 철회로 정리되었다.

▲ 1998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에 맞서 36일동안 총파업투쟁을 벌였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고립된 채 투쟁을 벌여야 했다. 회사는 7월 17일 정리해고를 단행하면서 해당자들에게 개별 통보하는 ‘노란봉투’를 전달했다. 7월 20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목숨을 건 파업에 들어갔다. 사수대가 조직되었고 아이를 등에 업은 조합원 부인들이 가족대책위를 꾸려 천막농성에 참여했다. 현대 자동차 조합원들의 이 투쟁이 얼마나 절박한 것이었는지는 조합원들의 다음의 발언에서 감지할 수 있다.

“공장 떠날 결심 이미 굳혔다. 여기서 어물정거리다 이상하게 끝나면 내 인생이 너무 비참하고 찝찝해질 것 같아, 가는데 까지 가보자는 거다. 어디 가서 밥 못 먹고 살까, 자동차에 대한 미련 다 끊어 냈다. 좀 다르게 싸우고 싶다. 정말 끝나도 좋다.”
“ 우리는 목숨까지 걸었어 ! 그거 알아 이 새끼들아?”
“ 더 이상 볼 거 뭐 있노? 공장 박살내고 집에 가자!”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는 36일 간의 전 파업투쟁 과정에서 드러나지만, 그 중 8월 10일 저녁 집회의 상황은 상징적이었다. 이날 오후 7시 집회가 시작될 즈음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폭우로 변해 집회장에 물이 찰 정도였다. 주변에 세워놓은 텐트에는 빗물이 이미 넘쳐들어 갔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대오를 흩트리지 않은 채 집회를 사수했다. 그 모습은 서로에게 투쟁의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저녁에 집회를 하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졌어요..우리 사수대가 앞에 앉아서 의연한 의지를 보였고, 조합원들도 한사람 움직이는 사람이 없는 거야. 비가 억수같이 내리붓는데... 전 간부가 앉아있는데 물이 위에까지 차더라고. 그때 한 동지가 천 찢고 북 두들기는 문선활동을 진행을 하면서 사람들이 감동해서 ‘이번 싸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그 때 앉아있던 사람들이 울고 했었죠.”

절박함과 다른 한편 자신감으로 땡볕과 장마 비속에서도 어린아이까지 안고 온 가족이 천막에서 36일 동안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노조지도부는 8월 24일 정리해고수용에 잠정합의를 했다. 조합원들은 허탈과 분노로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노조 사무실로 쳐들어가 유리창과 집기들을 부수고, 사수대 옷을 벗어 불태우고 관을 끌어내려 불태웠다.

“그때 정리해고 받아들이고 난 뒤에 새벽에 현장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다시 반석위에 올려놨던 노동조합이… 엄청난 혼란과 기반이 흔들렸죠. 집으로 가버린다고 가버리고… ‘더 이상 기댈 것도 믿을 것도 없다’하면서 많이 울었죠”
“마지막으로 결과 보고하는 그 시점에 불만들이 피어나오기 시작해가지고 급기야 보고대회 하는 과정에 사회자한테... 조합원들 고함지르고 조합원들 흥분해가지고 부수고... ”

투쟁이 패배한 이유들

지도부가 피해를 최소화한다며 받아들인 구조조정으로 조합원들은 깊은 패배감을 맛보았다. 투쟁이후 현대자동차 투쟁을 둘러싼 여러 평가들이 있었다. 그 핵심내용은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꺽은 투쟁지도부의 동요와 타협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모두 맞다. 조합원의 투쟁동력이 문제가 아니라 조합원을 믿지 못한 지도부에게 있다는 것은.

그런데 패배의 원인은 현대자동차 노조지도부에게만 있는 것인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하는 동안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은 무엇을 했는가. 현대자동차의 구조조정반대투쟁은 단순히 한 사업장의 자본과 조합원의 투쟁이 아니라 ‘총 자본과 총 노동’의 대리전이라는 성격에 주목한다면, 이는 분명 민주노총 지도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현자투쟁을 전국 투쟁으로 발전시켜냈어야 했고, 투쟁을 엄호했어야 했다. 적어도 현자 노조지도부가 흔들리지 않게 방향을 잡아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는 8월 23일 열린 ‘정리해고 저지와 민주노조 사수 전국 노동자대회’에서 오히려 “현대자동차 협상이 만약 불만족스러운 내용으로 타결되더라도 인정해 주자”고 하여 집회 참가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사수하지 못했다.

또,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정권과 자본의 총공격에 맞서 투쟁하다 깨져나가는 상황에서 다른 민주노총의 조합원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리 사업장 일이 아니라서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지 않았는가. 노조지도부의 판단과 결정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나. 왜 지도부의 반복되는 총파업 철회결정에 행동으로 발언하고 일어서지 않았을까.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행동은 어디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 역시 현대자동차 노조투쟁이 패배한 한 요인이라고 본다.

▲ 2010년, 구미지부 KEC지회가 사측의 탄압에 맞선 투쟁을 힘차게 진행하고 있다. 정권과 자본의 총공격을 전체 노동자의 문제로 인식하고 전면적인 투쟁으로 힘을 모아가야 한다.
그래서 1998년 현대자동차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패배했다. 현대자동차 노조만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전 민주노조운동의 패배였다. 그 뒤 이런 상황은 반복된다. 1998년 현대자동차투쟁 이후 2001년 대우자동차, 2009년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 등이 벌어졌고, 2000년 이후 이랜드, 기륭전자 등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둘러싼 투쟁은 격렬해지고 장기화되었다. 왜 그런가. 구조조정과 비정규직문제는 이제 개별 자본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법을 앞세운 총자본의 공세이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자신감을 갖고 사업장 한 곳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각개 격파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은 어떠한가. 한 사업장에서 투쟁이 터지면 본조에서부터 지회까지 모두 전력을 다해 대항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현실이다.

지금은 정권과 총자본의 총공세국면이다. 타임오프제, 비정규직 개악법과 같은 법제도적 차원으로 선제공격한 뒤, 개별 사업장을 각개 격파해 가고 있다. 이제는 자본의 전국적이고 개별적인 탄압에 대해서 전체 노동자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전면적인 투쟁으로 힘을 모아가지 않는다면, 그 다음은 바로 내 일자리가 사라지고 우리 노조가 깨진다.

유경순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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