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들어 금속노조는 정권과 자본의 타임오프제 강행에 맞서 노조활동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타임오프제는 민주노조운동의 근간을 뒤 흔들려는 것이며, 나아가 전태일 열사 분신이후 40여년 온 몸을 던져 이루어 온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허물기 위한 것이다. 모두 알고 있듯이 민주노조운동은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있었고, 1984년 구로공단에서도 민주노조운동이 있었지만, 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그 정신을 계승한 것이 노동자대투쟁이다. ‘직선제 쟁취’만을 주장하던 6월 항쟁에서 외면당한 노동문제를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스스로 바꾸기 위해 일어났다. 대투쟁은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노동현장의 힘 관계를 바꾸고 한국사회에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알렸다.

노동자는 일하는 기계

‘직선제’를 요구하던 민중의 함성이 전국을 가득 메웠던 1987년 6월 항쟁이 직선제 수용을 담은 ‘6․29선언’으로 주춤하던 시기에, 전국의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들고 일어났다. 이 투쟁에 현대 엔진 노동자들이 앞장섰다. 현대 엔진의 민주노조결성은 노동자들이 단결의 힘으로 정권의 탄압과 개입을 물리칠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것이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처지는 어떠했을까. 대부분의 현대그룹 사업장의 정문을 들어서면, "경비는 군대헌병용 헬멧을 쓰고 전투화를 신고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을 째려 본다"는 현대 노동자들의 말로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자본가들은 경기가 나쁠 때는 감원을 하고, 경기가 좋을 때는 기업을 넓히거나 재투자라는 갖은 이유를 들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노동자의 생존권을 쥐고 흔들었다. 심지어 자본가들은 아침 20분 일찍 출근하기, 강제 체조, 군대식 머리 깎기, 부당한 부서이동 등으로 노동자들을 쥐어짰다. 이런 상황은 전국 사업장 어디에나 비슷했다. 더욱이 현대 그룹 13개 울산공장에는 노동조합이 한 군데도 없었다. 전국을 돌아봐도 한국노총 소속의 노조는 있으나 제대로 활동하는 곳이 없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일방적 통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의 결단이 역사를 바꾸다

이런 분위기에서 1987년 7월 5일, 현대 엔진 노동자들의 ‘민주노조결성’은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다. 이들의 노조결성은 어떤 분위기에서 이루어졌을까. 결성 당일의 상황을 보면, 회사 측이나 정보기관에 알려지지 않도록 철저히 비밀을 지키면서 101명의 노동자들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울산 시내 한복판, 디스코텍에 모였다. 노조결성식을 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노래를 부르면서, 더 이상 ‘일하는 기계’ 이기를 거부할 것을 다짐했다.

더 이상 보람도 희망도 없는 “노예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다음 날,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열린 노조결성 보고대회에서 사회자가 “우리는 노사협의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상여금차등철폐와 임금인상 같은 문제를 놓고 사용주 측과 협의하는데 한계를 느껴....노조를 결성했습니다”라는 발언을 하자, 노동자들은 흥분해 식당이 떠나갈 정도로 함성을 질렀다. 뒤 이어 노조위원장이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고 하자, 다시금 함성이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어떤 이는 눈물을 글썽이거나 각오를 새롭게 하느라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현대 그룹은 노조결성에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정주영 회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노조를 인정하지 않겠다” 며 신고필증이 나올 동안 관리자들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해 노조탈퇴를 강요했다. 심지어 “바이어가 수주 협상을 하다 노조가 만들어졌다니까 도망갔다”는 말을 퍼뜨려 노동자들을 불안하게 하려 했다. 이런 자본가들의 탄압은 노조가 결성된 곳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첫날부터 조합원 가입이 1천여 명이 넘었으며, 조합원들이 130만원의 성금을 모아 노조활동에 쓰라고 내놓기도 했다. 마침내 7월 14일, 설립신고필증이 나오자 조합원들은 감격했다. 그 시기 노동자들에게 노조 가입은 생존권을 내거는 중대한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 결단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었다. 현대엔진의 노조결성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 노동자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들불처럼 옮겨 붙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힘’이 곧 법이다

이처럼 현대엔진 결성은 “현대는 안돼!”라는 고정관념을 부수고, “현대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노동자들에게 주었다. 그 결과 현대미포조선, 현대중전기, 나아가 노조탄압에 맞서 단결의 폭을 넓혀 ‘현대그룹노조협의회’를 만들기도 했다.

울산을 뒤덮은 노동자 투쟁의 함성은 7․8․9월 거제, 마산, 창원 같은 남부지역을 휩쓴 뒤, 중부지역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을 뒤덮었다. 이때 10인 이상 사업장의 노동자 수가 333만 명이었는데, 7․8․9월 투쟁에 122만 명이 참여해, 전국 노동자의 3분의 1이 투쟁의 주체로 나섰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임금인상, 노동시간단축, 근로조건 개선’ 같이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은 인간적 대우를 요구하였고 권위주의적 관리체계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심지어 현대중공업 노조는 '두발 자유화'를 요구조건으로 내걸 정도였다.

노동자들은 단순히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 등의 투쟁에 머무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결성하거나, 어용노조 민주화를 포함한 노동 3권 쟁취를 위한 투쟁으로 나섰다. 투쟁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관철되어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노동자와 자본가의 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힘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투쟁방식에서 나타났는데, 파업과 시위는 기본이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여 기선을 제압하면 그 힘에 눌린 자본가들이 협상테이블에 앉아 교섭하는 ‘선 파업 후 협상’ 방식이었다. 노동자의 ‘힘’이 곧 ‘법’이 되어 현행법을 무시한 것이었다. 또한 노동자들은 정권과 자본가들이 악선전과 공권력 투입으로 파업을 뒤흔들자, 사업장의 담을 넘어 지역별, 재벌 그룹별, 산업별로 연대투쟁을 하거나 거리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대투쟁의 결과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던 노동자들이 자신을 ‘생산의 주체’로 인식하면서 노동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또 민주노조를 전국 현장에 뿌리 내리고, 이어 지역, 업종, 그룹으로 단결의 폭을 넓혀, 마침내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라는 전국조직을 건설했다. 이후 노동자의 힘은 민주노총 건설과 산별노조 건설로, 그리고 1996년 7월 노동법개정총파업투쟁으로 모아졌다.

2010년 노동자들은 자신의 ‘힘’이 얼마나 큰지 자신감을 많이 잃은 것 같다. 1987년 대투쟁 이전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감을 잃고 “우리가 뭘 할 수 있어”하며 체념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요구를 바탕으로 떨쳐 일어선 노동자들의 힘이 퍼져나가 전국 곳곳에 민주노조의 깃발을 휘날렸던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돌아보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힘’이 곧 ‘법’이라는 것이다. 바로 노동자의 ‘힘’이 ‘법’을 변화시켰고, 나아가 노동자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유경순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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