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야단법석이다. 모이기만 하면 축구이야기로 온통 뒤덮으면서, 이번에도 우리 국가대표팀의 16강 진출여부를 놓고 온갖 경우의 수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생활에 찌든 사람들에게서 월드컵이 청량제 역할만을 한다면 누가 탓을 하랴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월드컵은 세상의 문제를 숨기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노동문제는 완벽하게 덮어 버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되기에 ‘월드컵 유감’이라는 언사마저도 나올 법하다.

축제의 기원

월드컵은 전 지구적으로 축제의 장을 제공하고 세계에서 가장 공을 잘 차는 나라를 뽑는 대회다. 축제란 원래 사회와 공동체 및 종교적 가치관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응집력을 부여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즉, 일상에서 벗어나 축제 동안에는 기존의 지배규범이나 가치관과 다른 행위를 용인하는 것이 축제의 숨겨진 규칙이다. 쉽게 말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특별한 행위일지라도 축제기간동안에는 묵인될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비상식적인 행동을 부추기기도 한다. 축제란 일상과 특별, 상식과 비상식의 바꿈을 통하여 사회적인 균열을 숨기고 사회적 응집력을 확장하기 위한 문화적인 수단이다.

과거의 지배세력은 자신들이 지닌 미숙함과 불완전함을 알고 있었기에, 민중적인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축제라는 장이 필요했다. 자신들이 지닌 문제점을 알기 때문에 민중적인 희망과 기대가 단 며칠이라도 분출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축제라는 문화적 수단을 이용했던 것이다.

▲ 노사관계에서 말하는 노사자율이라는 원칙은 법치주의보다 진전된 원칙이다. 지난 11일 오전근무를 마친 보쉬전장지회 조합원들이 대전충북지부 결의대회 참석 전 공장 안에서 약식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이르러선 축제와 지배는 기능적으로 철저하게 분리되면서, 축제는 축제일뿐이다. 오히려 축제기간에 지배세력은 항상적으로 행사하는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양상마저도 등장한다.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이 다른 곳에 쏠려 있을 때, 지배자들의 이해에 부합하는 정책을 발표하거나 시행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노사관계에서는 노동자의 입장이 아니라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새로운 제도나 정책을 시행하려고 시도하는 일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길가는 행인들이 많지 않은 으슥한 뒷골목에서 주먹이 법보다 앞서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일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축제의 장 뒤편에는?

현재 전임자 임금지급금지에 대한 노동부의 유권 해석이랄 수 있는 매뉴얼에 대한 논란은 축제의 장 뒤편에서 벌어지는 야바위판과 같은 느낌마저 준다. 노동부 매뉴얼은 사법부의 유권해석이 아니라 행정적 해석이기 때문에 법률적인 강제조치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는 마치 신성한 자구에 손을 대는 불경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매뉴얼에 담겨 있는 내용 그대로의 시행만을 고집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부의 신성한 명령을 어겨서는 곤란하다는 식의 국가지상주의와 국가의 규칙을 어기면 징벌을 받는다고 믿는 전제적 국가의 망령이 노사관계에서는 그대로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노사자율에 의해 결정된 사안이라 할지라도, 어느 날 갑자기 국가가 정한 규칙에 따라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법치주의가 아니다. 왜냐면 노사관계에서 말하는 노사자율이라는 원칙은 법치주의보다 진전된 원칙이기 때문이다. 즉, 이해당사자 사이에서 체결되는 약속과 협약이 법보다 훨씬 나으며 우선된다는 점이다. 또한 법이 가진 추상성과 애매성보다는 이해당사자가 처한 조건과 상황이 기본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을 협약이 오히려 잘 반영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의 노동현실에선 나은 원칙보다 구시대적인 원칙이 새로운 것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말 그대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을 정상이라고 주장하는 궤변과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축제의 희생양은 누구인가?

축제가 축제다우려면 항상 희생양이 존재해야하고, 희생양을 통하여 사람들의 만족감을 극대화하는 구조가 존재한다.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을 둘러싼 타임오프 제도의 시행령 매뉴얼을 보면 축제의 희생양은 어쩌면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게다가 축제의 희생양은 항상 자신이 희생양임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자신 역시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착각에서 빠진 채, 자신의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 들였다는 신화가 현대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는 것 같아 뒷맛이 씁쓸할 뿐이다.

과거시대 축제가 가졌던 해방적 의미를 현대의 지배권력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그지없는 유치한 발상이겠지만, 그래도 축제기간동안 만이라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잠깐의 여지마저 저들은 왜 주지 않을까? 그래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데 말이다. 축구 국가대표팀의 승리로 인한 잠깐의 만족감과 행복감을 만끽하는 순간에도 사회적 균열과 분열을 심화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의 시행을 서두르는 노동부의 행위를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까라는 질문이 머리를 맴돈다.

이종래 / 한국노동운동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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