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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언니가 만들어 온 길 따라 우리가 갑니다”노조 여성위 수련회, 김진숙 지도위원과 함께…“여성 노동자가 세상 바꾼다”
박재영, 사진=변백선, 편집=신동준  |  edit@ilabo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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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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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이 전국을 휩쓸었다. 자고 일어나면 수십 개의 노조가 세워졌다. 조금씩이나마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고 노동환경이 나아졌다. 해고됐던 많은 노동자가 공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은 돌아가지 못했다.

97년 경제 위기가 닥쳤다. 국가는 국민이 모아준 성금과 세금으로 기업이 진 빚을 갚아 줬지만, 기업은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면서 해고는 일상다반사가 됐지만 몇몇 해고 노동자들은 투쟁 끝에 공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김진숙은 안된다”였다. 투쟁할수록 자본은 김진숙의 복직만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노조 집행부의 비리를 폭로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대공분실에 끌려갔다가 징계해고된 김진숙 대의원은 복직을 요구하며 공장 밖에 서 있다. 35년을 그렇게 서 있다. 함께 해고된 동지들은 복직했지만, 김진숙은 여전히 복직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그러는 동안 박창수가 죽었고 김주익이 죽었다. 곽재규, 최강서가 죽었다.

35년 전 “검은 보자기에 덮어씌운 채 눈매가 무섭던 낯선 남자들에게 대공분실로 끌려갔던” 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자 김진숙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물었다.

“저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말씀하셨던 문재인 대통령님, 저의 해고는 여전히 부당합니까?”

금속노조 여성위원회가 10월 22일 부산 함지골청소년수련원에서 여성조합원 수련회를 열었다. 여느 수련회와 달리 오롯이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 함께 하기 위한 수련회였다. 아침 출근 투쟁을 함께 하며 잠깐이라도 그녀의 투쟁에 힘을 보태자는 노조 여성조합원들의 마음이었다.

금속노조 여성조합원들은 “김진숙 언니가 만들어 온 길을 따라 우리가 갑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걸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맞이했다. 지금 김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뿐만 아니라 암과도 싸우고 있다. 그러나 한 시간 남짓한 강연 내내 김진숙 지도위원의 목소리를 카랑카랑했고 눈빛은 단호했다. 김 지도위원의 눈은 승리를 내다보고 있는 듯했다.

 

군계일학 대의원

“18살에 노동자 됐어요. 옷 만드는 공장이었습니다. 동네 친구이거나 친척이었던 여공들은 공장에서 부르는 이름과 기숙사에서 부르는 이름이 달랐어요. 13살 이하는 어려서 취업이 안 되니까 신분을 속이고 남의 이름으로 취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회사도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어요”

어린 여공들은 조장들이 15원에 파는 각성제를 먹으며 잠을 아예 안 자는 ‘곱빼기 철야’를 했다. 여공들은 약을 먹고 감각이 마비된 상태에서 미싱 바늘이 손가락을 박을 때까지 일했다. 생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여공들은 남성 관리자들이 수시로 성추행을 해도 그것이 성추행인지도 모르고 당해야 했다. 여성 인권은커녕 성추행이 범죄라는 개념도 없었던 때다. 김 지도위원은 그때를 “나도 아무것도 몰랐던 한심한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김 지도위원은 1981년 용접공으로 한진중공업에 입사한다. 남성 조합원 오천 명 중 유일한 여성 조합원이었다. 김 지도위원은 공장에 다니며 야학에 나갔다. 대학 나오면 일하면서 욕도 안 먹고 때리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야학을 잘못 골랐다.

“당시 야학은 노동법을 가르쳐주는 노동야학과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야학이 있었는데 둘을 구분 못 해 노동야학에 들어갔어요”라며 김 지도위원은 웃었다. 노동야학에서 전태일과 노동권을 얘기하는 것에 놀라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여기 말고는 김 지도위원한테 존댓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신고를 단념하고 계속 노동야학에 다녔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잔업을 받기 위해 직장(반장)에게 술까지 사는 노동자 ‘아저씨’들에게 강제 잔업은 근로기준법이 금지하고 있는 불법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그래서 아저씨들은 김 지도위원이 다가오면 “근로기준법 온다”라며 피했다고 한다.

1986년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 선거와 대의원 선거가 열렸다. 김 지도위원은 대의원에 출마했다. 회사 관리자가 불러 왜 출마하냐고 물었다. 김 지도위원은 “민주노조 쟁취하러 출마한다”라고 대답했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당시 현장 대의원들은 모두 회사 관리자들이었다.

김 지도위원이 출마한 부서만 유일한 경선이었다. 3명을 뽑는데 6명이 출마했다. 김 지도위원이 1위로 당선됐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대의원 88명 중 87명이 사측 관리자였다.

당시 어용노조가 낸 대의원대회 자료집을 보니 살아계신 김 지도위원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로 되어 있었다. 더 가관인 것은 다음 페이지에는 살아서 환갑잔치를 벌였다.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살아나시기를 반복했다. 다른 조합원들 부모님도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났다. 5천 명이나 되는 조합원의 자녀들은 초등학생까지 모두 결혼했다. 어용노조는 그런 방식으로 경조사비를 떼어먹었다. 다치면 노조에서 주는 위로금 2만 원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30년 일한 노동자도 위로금이 있는 줄 몰랐다. 하지만 김 지도위원 이름 옆에 6개의 도장이 찍혀 있고 위로금 12만 원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기본급이 136,100원이던 시절이었다.

 

“웃으며 일하고 퇴근하는 게 노동해방이지”

김 지도위원은 어용 대의원들이 횡령한 돈을 받으러 다녔다. 집까지 찾아갔다. 돈 어쨌냐니까 다 어용 대의원들은 다 썼다고 대답했다. 대문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떼먹은 돈 내놓으라고 했다. 김 지도위원은 동네에서 유명해졌다. 빚쟁이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김 지도위원은 빚쟁이라는 오해도 풀고 더 압력을 가하려고 압박 붕대에 매직으로 단결이라고 쓰고 태극마크까지 그려 넣었다. 김 지도위원은 “그때 머리를 띠를 매고 집에서 출발하는데 당시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그런데 만나는 아저씨마다 ‘진숙아 네 머리 다쳤노?’라고 물어보더군요. 거울을 보니 머리에 두른 압박 붕대가 늘어나 단결이라는 글씨는 보이지도 않았어요”라며 웃었다. 어용 대의원들은 생각보다 순진했다. 돈을 돌려줬다. 김 지도위원은 받은 돈을 조합원들에게 돌려줬다.

“어느 날 현장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 올려다보니 50살이 넘은 아저씨가 저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어요. 그 웃음 하나가 가슴에 확 와닿더라고요. 5년을 같이 일했지만, 그 아저씨가 그렇게 웃는 것은 처음 봤어요. 그때 결심했어요. 내가 노동조합 하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저 웃음만은 지켜주자고”

김진숙 지도위원은 “노동해방이 뭐 거창한 이데올로깁니까. 저렇게 웃으면서 출근하고 퇴근하는 세상이 노동해방 세상이지요”라고 했다.

관리자만 보면 피하던 노동자들은 더는 관리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장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관리자가 보자고 하여 나갔다가 낯선 남자들에게 검은 보자기에 씌워진 채 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차가 어딘가에 도착하는 듯하더니 ‘충성’하는 경례 소리가 들렸다. 부산지방경찰청 대공분실이었다.

 

대공분실, 고문과 해고

방은 사방이 온통 빨간색이었다.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사관들은 시신 밑에 까는 널빤지라며 김 지도위원을 칠성판에 묶었다. 몹시 맞았다. 거꾸로 매달리니 눈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수사관들은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사표를 쓰라고 강요했다. 김 지도위원은 “나를 대의원으로 뽑아준 사람들에게 내가 사표 써도 좋다는 서명을 받아와라. 그러면 사표를 쓰겠다”라며 버텼다. 그렇게 대공분실에 3번 끌려갔다. 그때가 아직은 어린 스물여섯 살이었다.

다행히 김 지도위원은 대공분실에서 살아나왔다. 그런데 나와서 보니 서울대생 박종철은 죽어서 나왔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온 일을 주변에 말하지 못했다. “죽은 사람도 있는데 내가 매 맞은 게 뭐라고” 그 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6월 항쟁 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당시 김 지도위원은 부산대에서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있었다. 7월 25일 새벽 대한조선공사(지금의 한진중공업) 공장 안으로 유인물이 반입됐다. 보너스 안 나오면 일하지 말자, 식당을 지어달라는 내용이었다. 해고자들과 함께 공장에 가보니 노동자들이 차도를 막고 집회를 하고 있었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노동가요가 없어 멸공의 횃불, 팔도 사나이, 진짜 사나이는 물론 군대에서 배운 ‘인천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까지 불렀다. 그 노래는 여성을 심하게 모욕하는 외설적인 노래였다. 하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나마 있던 유일한 노래는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한 ‘늙은 노동자의 노래’뿐이었다.

3천 명이 길을 막고 파업을 했다. 어용노조는 도망가고 없었다. 노동자들은 공장 건너편에 있던 어용 노조 사무실로 향했다. 그야말로 노조 사무실을 가루로 만들었다. 다시 길을 건너 공장으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길을 막아야 신문에 난다고 하자 3천 명이 도로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도로 점거 농성은 그렇게 시작됐다.

제대로 준비도 없었고 노래 한 곡 제대로 몰라도 신나게 집회를 했다. 집회 신고도 쟁의 발생 신고도 없었다. 그냥 스위치 내리고 나가면 집회고 파업이었다.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

1990년 박창수 위원장이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에 당선됐다. 첫 민주노조였다. 박 위원장에 대한 조합원들의 신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4명의 후보 중 93%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위원장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구속된 상황이었다. 한진중공업 해고자인 김 지도위원이 3년 전 한진중공업 파업 집회에 참가해 해고자 복직의 정당성을 말한 일을 문제 삼아 3자 개입 금지법 위반이라며 구속했다.

노조 선거가 끝난 날 박창수 위원장이 면회 마감 시간이 다 되어 구치소로 면회를 왔다. 박창수 위원장이 김 지도위원에게 말했다. “김 동지 이제 고생 끝났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그때만 해도 순진했어요. 우리 손으로 위원장만 뽑으면 다 되는 줄 알았으니까요. 임금도 우리 손으로 올리고 작업복도 춘하추동으로 갈아입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덜 익은 밀가루빵이 아니라 밥을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지 뭡니까”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김 지도위원이 구치소에서 나오기도 전에 박창수 위원장이 구속됐다. 3자 개입 금지법 위반이었다. 대우조선 파업에 연대하기 위해 회의를 했다는 이유다.

박창수 위원장은 구치소 안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머리를 다쳤고 안양병원에 입원했다. 5월 6일 새벽 교도관과 경찰관이 지키고 있는 병실에서 누군가가 박 위원장을 데리고 나갔다. 박창수 위원장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링거를 꽂은 채 병원 옥상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부검에 동의한 날 백골단이 오함마로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와 유가족을 폭행하고 시신을 탈취해 갔다. 유족과 동료들은 뉴스 통해 노동운동에 염증을 느낀 자살이라는 부검 결과를 들어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박창수 위원장을 잃었습니다. 어제저녁까지 같이 밥을 먹은 사람을 땅에 묻으며 민주노조 운동은 여기까지 온 겁니다” 김 지도위원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

2003년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수빅에 영도조선소 규모의 10배가 넘는 조선소를 지었다. 노동자도 관리자도 모두 비정규직이었다. 임금은 영동조선소의 1/10이었다. 한진중공업은 영도조선소 노동자 650명을 해고하고 138명을 교육 발령냈다. 지회가 반대하며 투쟁을 벌이자 7억 4천만 원의 손배가압류를 자행했다. 지회 간부들의 임금과 조합비도 가압류됐고, 7명은 집까지 압류당했다.

그러나 한진중공업은 2002년 239억 원의 흑자를 냈다. 조남호 회장 일가는 배당금 78억 원을 받았다. 그러나 사측은 2002년 임단협에서 임금 동결을 요구했다. 21년을 일한 김주익 지회장조차 기본급이 105만 원에 불과했다.

김주익 지회장은 2003년 6월 11일 밤 9시 50분 컴컴한 어둠 속에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김주익 지회장은 129일을 싸웠다. 지회도 7월 22일 무기한 총파업 들어가며 함께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사측의 악랄한 탄압에 파업 대오는 흩어져 갔다. 10월 17일, 김주익 지회장은 35m 크레인에서 목을 맸다.

“크레인 위에 올라가 보니 김주익 지회장이 유서를 세 번 썼더라구요. 유서마다 날짜가 달랐습니다. 얼마나 살고 싶었겠습니까”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을 못 견디고 10월 30일 곽재규 열사가 4도크 바닥에 투신한다. 김주익 지회장이 목을 맨 85호 크레인 바로 밑이었다.

 

김진숙과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의 복직을 희망한다.

김주익의 죽음으로 한진중공업은 지회와 고용안정을 약속했지만 2011년 다시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이번에는 김주익 지회장이 올랐던 85호 크레인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라갔다.

“조합원들을 지키겠다고 20년지기 동지를 잃었는데 저는 무엇을 해야 했겠습니까. 김주익 지회장이 목을 맸던 난간을 지나 김주익 지회장의 시신이 누워있던 공간에서 309일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진중공업은 다시 매각의 위협 앞에 놓여있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자본가들 말 한마디에 수천 명의 노동자 생존권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지금 세상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짤립니다. 하지만 남성들보다 원칙적인 여성조합원들이 세상을 바꾸는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힘들지만 힘내고 끝까지 함께 갑시다”라며 이야기를 마쳤다.

오는 12월 31일이 되면 정년이 되는 김진숙 지도위원은 매일 아침 영도조선소 앞에 선다. 손에 든 피켓에는 박창수 위원장의 사진과 함께 ‘같이 정년퇴직하고 싶은 내 동기 박창수’라고 쓰여 있다. 김 지도위원의 복직은 단지 35년 해고 노동자, 사번 23733 김진숙 용접사의 복직만이 아닐 것이다. 박창수의 복직이고 김주익, 곽재규의 복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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