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노조 집행부는 6월의 임단협 투쟁을 노동법개정투쟁으로 상승시키면서 투쟁의 전국화를 꾀할 계획이라 한다. 금속노조 지도부의 이러한 의지에 대하여 옳니, 그르니 하는 식의 말은 별로 영양가가 없어 보인다. 힘 빠지게 하는 지역과 단위사업장의 소식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힘든 정세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전국적인 투쟁전선을 구축하려는 의지는 칭찬받을 일이지, 결코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문제는 싸우려는 의지의 부족이 아니라 이미 정형화된 자본과 정부의 노조무력화 시나리오를 알면서도 당하고만 앉아있는 현실부터 따져봐야 투쟁의 방식, 내용, 성격이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

노조무력화로서 단협해지

금속산업에선 2010년 들어서면서 기업이 일방적으로 노조에 단협해지를 통보하면서 노사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다. 물론 단협해지를 통한 노조무력화전술은 공공부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형화된 수법이다. 게다가 정부산하 기관에 대한 예산통제를 통하여 공기업에선 임금인상마저 사실상 불가능한 지경이다. 이런 마당에 노조활동은 정부의 부당한 개입으로 인하여 더욱 위축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단체교섭에 불성실하게 임하는 사용자들을 상대로 하여 철도노조는 파업을 벌였지만, 노동부는 정치파업이라고 규정하면서 철도노조 위원장을 구속하는데 일조했다.

사용자의 일방적인 단협해지에 대해 노조가 자구책으로 선택하는 파업권의 행사마저도 불법이라고 몰아붙이는 MB 정부의 용감함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라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들이 합법성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서 이상야릇한 도착 증세에 빠져 들게 한다.

▲ 사용자의 일방적인 단협해지에 대해 노조가 자구책으로 선택하는 파업권의 행사마저도 불법이라고 몰아붙이는 MB 정부의 용감함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라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한다. 두산자본의 단협해지와 노조말살에 맞서 싸우는 동명모트롤지회 조합원들이 지난해 상경투쟁을 벌이고 있다.

합법적 투쟁이면 그만?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단협을 해지하는 행위는 노조를 무시하는 태도로 밖에 볼 수 없다. 왜냐면 협상 상대방과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경우에만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는 게 사회적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언가를 만들어 보자고 협상 자리를 만들고, 서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고 상대방과 대화를 한 결과가 오늘날의 단협이다. 이 단협에서 약속한 사항을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어기지 못하도록 단협의 효력을 법과 동일하도록 하는 것이 노동법의 기본 원리이다.

하지만 이런 단협체계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통해 형성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왜냐면 사사건건 약속위반을 하는 상대방이 존재할 경우 단협보다는 노동법으로 모든 것을 규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약속위반을 밥 먹듯이 하는 상대방이 있다면 국가는 법적 강제력을 행사하여 이들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단협 체계에는 블랙홀에 가까운 괴물 같은 구멍이 존재한다.

바로 사용자에게 성실교섭의무를 한편으로 부여하면서도 불성실교섭에 대한 판단은 아주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에 대한 제재조치는 아주 미약하다는 점이다. 즉 단협체결에 대한 강제나 의무조항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노사동등이라는 형식적인 권리배분 논리에 따라 사용자에게도 단협해지권을 인정하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사용자는 단협을 체결하자는 노조의 요구에 대해 아주 수동적 혹은 형식적으로 대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사용자측 대표는 협상장소에 나와서 엉뚱한 말만 하거나 먼산만 바라보면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기만 하면 불성실교섭으로 인한 제재조치는 피할 수 있고, 노조의 요구안에 대해 비현실적인 협상안을 계속 고집하면서도, 때가 됐다 싶을 때 단협을 일방적으로 해지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불공평이 현실로 엄연히 존재하는 가운데 노조에겐 합법적 행위만 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식의 노조 죽이기는 MB정부 이전인 참여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도 진행되어 왔고, MB정부에선 적용의 폭과 범위가 늘어나고 있을 뿐이다.

투쟁의 정당성 동의되어야

현장의 노동자들이 왜 풀이 죽을 대로 죽어 있는지는 노조활동가 중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지방선거결과가 고무적이면 노조의 투쟁이 활발해 질 것이라는 기대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고 있을지, 혹은 노조지도부의 확고한 투쟁의지가 있으면 조합원대중은 여전히 지도부의 의지대로 투쟁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신뢰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이미 고령화로 인해 몸을 움직이기 마저 어려운 조합원들이 경제위기 이후 무수히 많았던 투쟁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실망을 더욱 키웠던 경험, 순진하게 투쟁에 나서는 당사자만 피해를 본다는 지극히도 이기주의적인 발상이 결과적으론 가장 손해를 덜 본 선택이었던 경험, 고통이 따르는 투쟁에서 얻는 가치의 소중함을 체득하기보다는 달콤한 소비의 유혹이 지나치게 많은 상황 앞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다.

노조라는 대중조직이 투쟁을 하려고 한다면, 자신들의 행위가 지닌 정당성에 대한 동의와 인정이라는 과정이 존재해야 한다.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 뭔가 목청을 높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투쟁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면, 투쟁의 이유는 제대로 공유되어야 노조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종래 / 한국노동운동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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