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노조 간부 3인을 구속하자 이에 분노한 몇 안 되는 민주노조들이 동맹파업을 벌여 거의 1주일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처럼 노조지도부들이 구속되면, 바로 작업장을 박차고 나와 투쟁하던 분위기, 심지어 다른 노조간부가 구속되어도 연대투쟁으로 맞받아치던 노동자들의 기상을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권의 노조간부구속에 맞선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돌아보며, 그 시기 노동자들이 동맹파업과 연대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그 영향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

대우어패럴 노조간부구속 사건

1985년 4월 대우자동차투쟁과 5월의 미문화원점거농성투쟁이 일어나자 정권은 잠시 늦추었던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민주노조들이 활개 치며 중간노조까지 견인하던 구로공단은 정권의 1차 탄압대상이었다. 신군부정권은 1980년 초 1970년대 민주노조들을 각개 격파시킨 것처럼 구로공단의 노조들을 하나씩 차례로 무력화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우선 1985년 임투에서 파업을 주도한 노조간부에 대해 자본가 측이 진행한 고소․고발 건을 이용하여 6월 22일 정권은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인을 구속시켰다. 이에 노조간부들과 조합원들은 충격과 분노로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 1985년 6월 23일 조합간부 3명이 구속된 것에 항의하며 파업농성에 돌입한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노조간부구속 사건에 대해 민주노조들은 어떻게 인식했을까. 6월 22일 저녁 늦은 시간에 민주노조간부들이 긴급하게 청계천의 한 봉제공장에 모였다. 이들은 전태일기념사업회에 모였다가 비밀유지를 위해 장소를 옮긴 것이다. 이들은 논의 끝에 6월 24일 오후 2시를 기점으로 동맹파업을 하기로 했다. 당시 논의에 대해 가리봉전자 사무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모임에서는 구속을 어떻게 봐야 하냐를 둘러싸고 논의됐는데 정권이 70년대 민주노조 깨듯이, 그렇게 민주노조 깨려고 한다. 대우어패럴만 깨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효성도 깨고,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깰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그럼 어떻게 할 거냐를 논의하면서 ‘단계적으로 깨지기보다도 힘을 합해서 함께 투쟁하자’고 결정했고. 그다음 어떻게 싸울 건가에 대해 ‘제일 강도 있는 싸움이 뭔가. 파업이 아니냐. 그럼 파업을 들어가자’ 그래서 동맹파업을 결정했죠“

이들은 대우어패럴 노조탄압은 바로 다른 노조탄압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1970년대 민주노조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정권은 대우어패럴 노조 하나를 깨는 게 목적이 아니라 민주노조 모두를 없애는 게 목적이었다. 노조간부들은 동맹파업을 결정한 뒤 바쁘게 돌아가 사업장별로 의견을 다시 모아 하루 만에 동맹파업을 준비했다.

구로지역 노동자들, 동맹파업으로 정권에 맞서다

마침내 6월 24일, “노조간부 석방하라, 민주노조 탄압 말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집시법․언기법을 폐지하라, 노동부장관 물러나라”는 구호가 구로공단에 울려 퍼졌다.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오전에 먼저 파업에 들어갔고, 오후 2시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3개의 민주노조들이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공장이 마주보고 있는데...효성도 파업 했잖아요? 우리가 “효성 힘내라” 하면 효성에서는 괭가리 치면서 “대우 힘내라” 이렇게 서로 격려했고. 다른 사업장도 파업들어갔다는 소식 들으면서 “우리 편이 많구나. 우리를 지지해주는 사람도 많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 했어요“(대우어패럴 부위원장)

이렇게 시작된 4개 노조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으로 물이 끊기고 전기가 차단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6일간이나 투쟁을 했다.

“물도 못 먹고.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3일째는 “지나가는 쥐라도 있으면 잡아먹고 싶다”고 얘기하고.기운이 없어 탈진할 거 같고, 그래도 진짜 깡으로 싸우면서 우리들끼리 서로 의지하고...“(효성 조합원)

투쟁은 들불처럼 확산되어 29일까지 5개 사업체 6개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벌였고, 힘이 못 미치는 5개 사업장에서는 잔업 거부 후 농성, 중식거부 같은 방식으로 지지투쟁을 벌였다. 구로공단 곳곳에서는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가두시위가 벌어지고 선전물이 배포되어 공단 노동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다. 또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같은 노동운동단체와 청년, 농민, 여성의 여러 운동세력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전라도, 경상도에서 지지농성, 지지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동맹파업을 중심으로 민중연대가 시도됐다.

▲ 구로동맹파업 이후 노동운동단체, 청년, 농민, 여성 등 여러 운동세력들이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지지대회, 농성 등을 진행했다.

6월 29일,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학생 18명이 식량과 의약품을 갖고 진입하자, 농성을 해체시킬 준비를 하던 자본가 측은 이를 기화로 폭력단 500여명을 동원해 농성자들을 폭력으로 해산시켰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과 다른 3곳에서 지지농성을 하던 민중운동세력들은 대우어패럴 농성이 강제 해산되자, 오후 성명서를 발표하고 해산했다. 또 6월 30일에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던 효성물산 조합원 36명도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5일간의 농성을 풀었다.

6일간의 동맹파업의 결과 구속자가 43명,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을 비롯하여 해고 1,50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피해가 있었다.

기업별 노조체계에서 어떻게 동맹파업이 가능했을까

노조 결성, 생존권을 주장 하는 것도 어려워 숨죽이던 시절, 1984년 유화조치라는 미명으로 광주민중을 무참히 살해하고 등장한 신군부정권의 사회통제가 잠시 느슨해진 사이, 1984년 구로공단에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의 민주노조들이 만들어졌다.

설립된 지 1년 밖에 안 된 노조의 조합원들이 어떻게 다른 노조의 탄압에 맞서 배고픔을 견디며 동맹파업을 벌였을까. 그 힘은 우선 민주노조들이 초기 자본가의 탄압을 이겨낸 뒤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른 일상 활동을 벌여 조직력을 높여 간 것에 있었다. 특히 1985년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을 뒤 엎은 임투의 승리로 조합원이 늘었으며, 조합원과 간부 사이의 신뢰를 두텁게 해 노조역량을 강화시켰다.

▲ 대우어패럴 농성시위를 탄압한데 항의하며 노동자, 학생들이 6월 24일 여의도에서 기습 가두투쟁을 벌였다.

다음으로 1970년대 사업장 안의 활동에 제한된 활동방식을 극복하려는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의 의식적인 노력이 있었다. 우선 각 노조 위원장과 간부들은 서로 활동교류를 활발히 했는데, 각 노조에 대한 탄압실태의 사례발표를 통해 간부들이 노동자로서의 동질의식을 느끼면서 공동대처 방법을 찾기도 했다. 또 조합원들은 각 노조의 여러 기념행사와 문화행사가 있으면 같이 참여해 연대의 감정을 느껴갔다. 특히 각 사업장의 숙박교육, 간부 숙박교육에도 서로 같이 참가해 밤을 새우며 사업장 상황도 공유하면서 노동자로서의 일체감을 높여나갔다.

이런 일상의 연대활동은 다른 사업장 투쟁을 지원. 연대하는 모습으로 까지 더 발전해갔다. 예로, 민주노조들은 한국음향과 동일제강 노조의 노조신고서 반려조치에 대한 항의농성, 대우자동차파업 지원 등에 적극 나섰다. 그 뿐만 아니라 비공개적으로 여러 노조간부들이 같이 참여하는 학습소모임을 만들어, 간부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밤을 지새워 근로자의식에서 벗어나 노동자의 눈으로 사회구조를 인식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여러 공장노동자들이 지역소그룹으로 모여 공부를 했는데. 여러 공장에서 모이니 ‘노동자는 어디나 서로 같다’는 것을 각자의 공장얘기들을 내놓고 얘기하다보면 자본가와 똑같이 대립되고 있는 거를 알게 되죠. 그러니까 노동자들도 계급의식이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대우어패럴 교선부장)

요컨대 노조활동을 바탕으로 조합원들은 노조간부와 노조를 철저히 신뢰했고, 나아가 의식적으로 일상에서 다양한 연대활동을 진행함으로써 조합원들은 ‘니네 공장, 우리 공장’이라는 기업별 노조의 틀을 벗어나 ‘노동자는 하나’라는 의식으로 점차 발전한 것이다.

노동자가 사회 변혁운동의 주체이다

구로동맹파업은 패배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노동자들의 ‘최초의 정치적 동맹파업’으로 이후 노동운동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동맹파업은 정부의 민주노조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한 비타협적 투쟁으로서, 노동자들이 기업별노조의 틀을 뛰어 넘어 정치투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즉 이 시기까지 노동자들은 ‘노동조건개선의 주체이니 정치투쟁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치활동은 정치인이나 재야운동 세력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동맹파업은 노동자들도 현장을 기반으로 정치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한 구로지역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으로 주위 민중운동세력의 지지연대투쟁을 이끌어 내, 노동운동이 민중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곧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민중이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것을 인식을 했다면, 동맹파업을 통해 노동자가 민중운동을 이끄는 주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끝으로 구로동맹파업은 ‘과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과 투쟁성을 계승하고, 그 한계인 연대부족을 ‘현실’의 실천과제로 받아 안아 연대활동을 의식적으로 실천한 결과였다. ‘과거’를 ‘현재’속에 녹여 ‘미래’를 여는 정신은 현실의 노동자들이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모색하면서 되새겨야 할 역사실천이기도 하다.

유경순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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