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든 화학물질은 등록 기준 약 1천 200만 종이고, 약 10만 종이 상업 유통되고 있고, 매년 2~3천 종을 새롭게 만들고 있다. 노동현장에서 유통되는 화학물질은 대략 10만 종이다. WHO(세계보건기구) 산하 IARC(국제암연구소)가 60년에 걸친 조사연구 작업을 통해 건강 유해·위험성과 독성정보를 명확히 밝혀낸 화학물질은 고작 1,000종에 불과하다. 이 1,000종의 화학물질 중 500종은 발암물질, 생식독성물질, 변이원성물질 즉 CRM 물질로 사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

화학물질은 1리터당 몇 마이크로그램(100만분의 1- 수영경기장에 소금 알갱이 하나를 넣은 정도) 보다 더 적은 양이 들어 있어도 충분히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발암물질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와 노출에 대한 정보 등이 전혀 없다.

 

반올림의 11년간의 싸움…유해물질은 그대로

삼성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에 걸린 피해자를 위해 싸웠던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은 삼성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 씨의 산재 인정 싸움을 시작으로 11년이 넘게 싸워왔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의 제안을 무조건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하면서 지난 7월 25일 1,023일, 3년의 농성투쟁을 정리했다.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님은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노동자 누구에게도 자신이 쓰고 있는 유해 화학물질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무도 교육하거나 알려주지 않았다”라고 통한의 이야기를 쏟아낸 적이 있다.

2016년 그나마 공개한 연구자료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사업장 11곳에서 평균 216종의 화학제품을 쓰고, 이 제품들은 모두 545종의 성분 물질로 구성돼 있었다. 이 중 25.9%가 발암성, 생식독성, 변이원성(CMR) 물질이다. 클린룸이라고 불리는 반도체 사업장은 유해 화학물질 수백 종을 사용하고, 이 중 1/3은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위험물질이라는 뜻이다. 삼성에서 일하던 노동자 중 반올림에 제보한 직업병 피해자는 320명이고 사망자는 118명이다.

 

“작업환경측정보고서는 국가핵심기술이라 공개할 수 없다”

노동자가 산재를 신청하면 산재가 업무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노동자 스스로가 증명해야 한다. 화학물질로 직업병에 걸렸을 때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일한 현장의 작업환경측정보고서가 필요하다. 어떤 물질에 얼마나 노출됐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측이 영업비밀이라는 핑계로 관련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질병을 증명하지 못한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병에 걸리고 사망한 노동자들은 직업병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삼성전자의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를 요청했다. 법원은 이미 삼성전자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는 영업기밀이 아니고, 산재노동자와 인근 주민의 생명, 신체의 건강 등을 위해 필요한 정보이므로 공개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삼성과 산업통상자원부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에 국가핵심기술이 포함됐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언론은 반올림이 삼성의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하려고 한다며 온갖 허접스러운 기사를 보도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작업환경측정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동자의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이며, 작업환경측정의 결과를 해당 작업장 노동자에게 알리고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해당 시설·설비의 개선 또는 건강진단의 시행 등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제하고 있다. 영업비밀이니 국가핵심기술이니 허울을 씌워 국민을 기만하는 삼성과 정부는 반도체 직업병의 공범이다.

 

노동자의 알 권리 위해 투쟁하자

30년 전 수은에 중독, 사망한 문송면,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직업병에 걸린 원진노동자, 삼성 하청업체에서 스마트폰 부품을 만들다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된 노동자, 도금사업장에서 맹독성 물질인 사이안화수소(청산가리)에 무방비로 노출돼 사망한 20대 노동자……. 지금 벌어지는 각종 화학물질 사고를 보면 대부분 유해화학물질의 위험성 교육은 하지 않고, 호흡용 보호구나 환기시설 등을 갖추지 않은 경우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라돈 침대의 공포 등으로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커지고 있으나 제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노동자의 안전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가 일하는 현장에서 화학물질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노출 위험은 무엇인지 알고, 보호할 수 있는 노동자는 많지 않다. 메뉴얼 따라 제품 A, 제품 B 정도로 알고 있는 노동자가 대부분이다.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현장, 물질의 정보를 영업비밀이라는 이름으로 제공하지 않는 현장이 수두룩하다. 사업주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해 작업자에게 유해물질의 위험성과 유해성을 교육하고, 유해물질의 발산을 억제하는 설비와 발산 원을 밀폐하는 설비를 설치하고, 국소 배기장치 등을 해야 한다. 그러나 법을 지키는 사업장은 보기 어렵다.

먼저 노동자가 법이 보장하는 보건조치를 사업주에게 요구하고, 경각심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 유해화학물질은 급성중독뿐 아니라 서서히 중독돼 잠복기가 지난 뒤에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화학물질로 인한 산재 입증 시 내가 쓴 현장의 물질을 알지 못하면 아무도 알려 줄 수 없다. 요구하지 않으면 현장은 절대 자발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적절한 보건조치를 스스로 하는 사업주의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금속노조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현재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검진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발암물질 중 국외에서 측정과 검진, 분석방법이 존재하는 물질을 즉각 대상에 포함하라는 요구를 걸고 투쟁하고 있다. 유해화학물질 관리체계 제도 개선과 노동자가 위험성에 관해 알아야 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중요한 투쟁이다. 투쟁도 중요하지만 법 제도가 현장에서 제대로 구현되려면 현장의 조합원들이 함께 투쟁해야 한다. 나와 내 동료가 보호 대책, 개선책 없이 무방비로 위험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동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조 노동안전보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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