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민 대한항공 전무가 광고업체 직원에게 물컵을 집어 던진, 일명 ‘물벼락 갑질’ 이후 대한항공 조씨 일가의 갑질이 언론을 뜨겁게 달궜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익명 단톡방)을 만들어 대한항공 갑질과 불법 비리 제보를 받았다. 조현민 어머니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호텔 공사현장에서 여직원을 폭행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공개됐고, 대한항공을 통한 개인물품 밀반입과 아버지 조양호 회장의 상속세 탈루까지 폭로됐다.

대한항공에 이어 아시아나항공에서 승무원들이 박삼구 회장 기쁨조에 동원됐고, 항공편을 사적 용도로 이용했고, 세관 신고 등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두 항공사 모두 재벌 3세들이 불법 등기이사로 재직했고, 반말과 욕설은 기본이었다. 능력 없고 인성도 떨어지는 3세들이 극소수의 지분만으로 대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실상이 드러났다. 두 항공사 직원들은 총수 퇴진과 갑질 근절을 요구하며 노조를 결성하고 합동 집회를 벌이고 있다.

▲ 골리앗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세력은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뿐이다. 삼성 백혈병에 맞서 의롭게 싸워 승리한 반올림처럼, 한국 노동운동이 재벌갑질 근절에 나서 싸운다면, 조금은 더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지 않을까.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7월 13일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그룹 본사 앞 ‘적폐 청산, 산별교섭 쟁취 금속노조 7.13 총파업대회’에서 금속노조가를 부르며 대회를 마무리하고 있다. 신동준

 

‘조현민 갑질’

지난해 11월 1일 출범한 비영리 공익단체인 <직장 갑질 119>에 갑질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 한림대의료원(한림성심병원)의 선정적 장기자랑 동영상 폭로를 시작으로 하루 평균 66건의 갑질 제보가 날아온다. 제보 내용을 보면 ‘응팔’(응답하라 1988)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사회가 민주화되면 직장도 민주화되는 것이 당연하다. 1987년 6월 항쟁의 정치적 민주화가 노동자 대투쟁을 불러왔고, 직장이 민주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 정책이 심화하고 비정규직이 급증했다. 과거에 사장, 전무 등 사용자들이 갑질을 했는데, 지금은 정규직 팀장이 파견직에게, 정규직 평사원이 계약직에게 갑질을 한다. 가장 약한 여성, 청년, 비정규직에게 갑질이 집중되고 있다.

노조가 약화 사업장에서 갑질이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1987년 이전에 관리자들에게 조인트를 까이고, 바리캉으로 머리칼이 밀렸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서 노조가 약화하고, 어용노조가 득세하면서 총수 일가의 갑질에 저항할 힘을 잃어버렸다. 노조가 없던 한림대의료원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갑질이 벌어졌다. 한림대의료원 노동자들은 <직장 갑질 119> 제보 한 달 만에 한림대의료원지부를 결성했고, 장기자랑, 체육대회, 청소 등 갑질이 대부분 사라졌다.

갑질이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자 정부가 나섰다. 지난 7월 5일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위계를 이용한 부당행위 등 갑질이 만연한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해 공공부문 갑질 범죄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는 ‘공공분야 갑질 근절 종합 대책’을 확정 발표했다. 이낙연 총리는 “우리 사회의 못난 갑질이 이제 세계적 수치가 됐다”라며 “우리 사회의 대표 생활 적폐인 갑질을 청산하기 위해 먼저 공공분야에서 근절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특별 단속을 벌여 인격침해형 범죄를 처벌하고, 국민권익위원회는 공무원 행동강령에 갑질 규정을 신설하고, 국무조정실은 연내에 갑질 근절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 공공부문에서 시작한 갑질 청산을 민간으로 확산하기 위해 국가 재정지원을 받는 기업의 갑질 행태가 적발될 경우 해당 기업에 대한 보조금을 제한한다. 정부는 ▲공공기관 감사·감찰 부서에 갑질 전담 직원 지정 ▲갑질 피해 신고·지원센터 운영 ▲국무조정실 공직복무관리관실 주관으로 연 1회 갑질 빈발 분야에 대한 감찰 시행 ▲카카오톡을 통한 익명 갑질 신고 방법 마련 ▲피해자·신고자에 대한 무료 법률 상담과 무료 소송 등도 추진한다.

정부 갑질 대책이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 갑질을 뿌리 뽑기는 쉽지 않다. 갑질이 집중되는 대상이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기업에서 벌어지는 갑질을 막을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 삼성전자서비스에서 벌어진 노조와해 갑질, 현대자동차의 불법고용 갑질과 납품단가 후려치기 갑질 등 재벌 갑질에 대해 정부는 모르는 체하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재판을 받는 국정농단 범죄자 이재용을 찾아가 일자리를 부탁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판국에 문재인 정부가 재벌개혁에 나설지 극히 의문이다. 한국사회 괴물이 되어버린 재벌을 그대로 두고 갑질이 사라질 수 있을까?

 

기업 양극화

자산 5조 원 이상 재벌이 국가 총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8년 5.09%에서 2017년 7.31%로 늘었다. 국내기업 총자산 기준으로 같은 기간 8.42%에서 12.04%로 증가했다. 자산 총액 100조 원 이상 상위 5대 재벌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가 전체 자산 5조 원 이상 재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자산 53%, 매출 56.2%, 당기순이익 70.5%를 차지했다(2017년 9월, 공정거래위원회 자료). 2017년 국내 100대 상장사 영업이익이 166조5천429억 원으로 1년 전(123조6천251억 원)보다 34.7% 증가했고, 매출도 1천875조4천21억 원으로 10.5% 늘었다(2018년 2월, 재벌닷컴 자료).

전체 상장사 영업이익에서 10대 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이 2016년 46.3%에서 2017년 59.5%로 13.2% 상승했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4대 그룹 계열 상장사의 영업이익은 33조5000억 원으로, 상장사 전체 영업이익의 절반이 넘는 50.6%를 기록했다.

재벌 사내유보금은 천문학적으로 급증했다. 2017년 말 기준 30대 기업의 사내유보금(비상장사 포함)은 전년 대비 75조6013억 원이 늘어난 882조9051억 원이다. 그룹별로는 삼성이 269조5924억 원으로 가장 많고, 현대자동차 135조2807억 원, SK 98조7578억 원, LG 55조9788억 원, 롯데 57조4109억 원 등이 뒤를 이었다. 삼성과 현대자동차, SK는 3년 연속 부동의 1, 2, 3위를 기록했다. 30대 그룹 사내유보금 중 상위 10대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759조2954억 원으로 전체 중 85%가 넘었다.

특히 눈여겨볼 자료가 있다. 산업연구원 이항구 선임연구위원이 7개 주요 기업과 협력사 1,160개를 대상으로 조사해 2015년 3월 29일 내놓은 ‘대기업 협력업체의 경영 성과 분석과 시사점’ 보고서다. 삼성전자 평균 영업이익률은 2008년 5.7%에서 2009년 7.2%, 2010년 11%, 2011년 8.1%, 2012년 13.1%, 2013년 13.8%로 상승했다. 그런데 같은 기간 삼성전자 협력업체들의 영업이익률은 4.6%, 6.4%, 7.2%, 4.5%, 4.2%, 4.2%로 감소했다.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은 2008년 5.8%에서 2013년 8.9%로, 현대모비스와 같은 현대차 계열 협력사의 영업이익률은 8.2%에서 9.3%로 증가했다. 하지만 비계열 협력사의 영업이익률은 같은 기간 3.6%에서 3.3%로 감소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청의 불공정거래 때문이다.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재벌 일감 몰아주기가 원인이다. 재벌 3세 경영 승계를 위해서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집단국은 삼성전자 본사, 삼성물산, 삼성웰스토리,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등을 현장조사 했다. 삼성물산의 자회사인 삼성웰스토리와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는 매출의 상당 부분을 계열사 내부거래로 올렸다. 삼성그룹의 급식과 식음료 서비스업체로 시작한 삼성웰스토리는 배당지급률이 2017년 기준 114.6%로 상장사 평균 배당성향 16.2%의 10배에 이를 정도로 순이익 대부분을 배당에 사용했다. 삼성물산의 삼성웰스토리 배당수익을 통해 이재용 부회장 등 총수 일가에 수익이 돌아간다. 국내 최대 건축설계사무소인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는 1976년 설립 이후 삼성 계열사의 건축설계를 도맡아왔다.

현대자동차그룹의 광고를 독점하는 이노션은 2005년 정몽구 회장 일가가 지분 100%를 가진 회사로 설립했다. 재벌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 대한 여론이 높아져 2014년 공정거래법이 개정되자 총수 일가 지분 매각과 증시상장을 통해 총수 일가 지분을 낮춰 규제대상에서 벗어났다. 총수 일가 지분은 정몽구의 딸인 정성이 고문이 27.99%, 아들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2% 등 모두 29.99%로, 규제기준인 30%보다 0.01%포인트가 작다. 그런데 이노션과 계열사 간의 내부거래 규모는 2013년 1,376억 원에서 2017년 2,407억 원으로 75% 급증했다. 정의선 부회장은 이노션 주식을 팔아 현대모비스 등 핵심 계열사 주식을 사들였다. 일감 몰아주기로 재벌 3세 경영 승계를 추진한 것이다.

총수 일가 지분이 30% 미만인 상장사는 현대글로비스·이노션·에스케이디앤디 등 24개이고, 규제대상 회사의 지분이 50%를 초과하는 자회사는 삼성웰스토리·삼성화재서비스손해사정 등 214개에 달한다.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재벌 일감 몰아주기라는 불법, 편법경영으로 기업의 양극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은 51.0%, 남자 정규직 임금을 100이라 할 때 여자 정규직은70.6%, 남자 비정규직은 55.0%, 여자 비정규직은 37.7% 수준이었다. 정규직은 국민연금·건강보험 가입률과 퇴직금·상여금 적용률이 95∼100%인데, 비정규직은 33∼41%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저임금계층은 23.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 임금불평등(상위1 0%와 하위 10% 임금격차, P9010)은 2014년 8월 5.00배, 2015년 8월 5.25배, 2016년 5.63배로 가파르게 증가해 OECD 국가 중 가장 불평등이 심한 나라로 확인됐다. 정리해고 당한 LG 하청 서울지부 서울남부지역지회 신영프레시젼분회 조합원들이 부당해고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임연철

 

노동 양극화

‘대기업 협력업체의 경영 성과 분석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2013년 사이 삼성전자의 평균 임금은 6,190만 원에서 9,995만 원으로 1.6배가량 늘어났지만, 협력사들의 평균 임금은 3,313만 원에서 4,465만 원으로 1.3배가량 증가해 격차가 44.7%에서 53.5%로 늘었다.

현대차의 평균 임금은 2008년 6,774만 원에서 2013년 9,458만 원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현대차 비계열 협력사의 임금은 3,948만 원에서 5,289만 원으로 늘어 격차가 58.3%로 증가했다. 반면 현대차 계열사들의 평균 임금은 같은 기간 6,193만 원에서 9,005만 원으로 늘었다. 현대차의 95.2%다. 기업의 양극화가 노동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는 자료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2017년 8월)를 분석한 결과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2017년 842만 명으로 42.4%다. 여기에 정규직으로 분류되는 사내하청(92만 명 이상),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특수고용(179만 명)을 포함하면 비정규직 규모는 1,113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는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은 51.0%, 남자 정규직 임금을 100이라 할 때 여자 정규직은 70.6%, 남자 비정규직은 55.0%, 여자 비정규직은 37.7% 수준이었다. 정규직은 국민연금·건강보험 가입률과 퇴직금·상여금 적용률이 95∼100%인데, 비정규직은 33∼41%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저임금계층은 23.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 임금 불평등(상위 10%와 하위 10% 임금격차, P9010)은 2014년 8월 5.00배, 2015년 8월 5.25배, 2016년 5.63배로 가파르게 증가해 OECD 국가 중 가장 불평등이 심한 나라로 확인됐다.

한국 노동자들의 근속연수 평균값은 5.9년이고 중윗값은 2.5년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짧다. 근속연수 1년 미만 단기 근속자는 31.3%로 가장 많았고, 장기근속자(근속연수 10년 이상)는 21.0%로 가장 적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고용이 가장 불안정한 초단기근속 국가다.

고용노동부가 표본사업체 3만2960개와 소속 노동자 85만 명의 고용형태·근로시간·급여 등을 분석해 발표한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2016년 6월 기준)’ 결과도 노동 양극화의 심각성을 확인해준다.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총액은 1만2,076원으로 정규직 1만8,212원의 66.3%였다. 대기업(300인 이상) 정규직 3만530원. 중소기업 정규직(52.7%). 중소기업 비정규직(37.4%)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 극 격차만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국사회 불평등의 핵심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에 있다는 사실을 각종 통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동 양극화와 노조의 상관관계가 중요하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2016년 전국 노동조합 조직현황’에 따르면 노조조직률은 10.3%였다. 300인 이상 사업장은 노조가입률이 55.1%였지만 100~299인은 15%, 30~99인은 3.5%, 30인 미만 사업장은 조직률이 0.2%에 불과했다. 민간부문의 노조조직률은 9.1%에 불과하지만, 공공부문은 67.6%였다. 100인 미만 사업장의 노조조직률은 2.7%로, 절대다수(92.3%)가 노조가 없는 실정이다. 300인 이상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노동조건은 노조의 투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2~3차 협력업체, 10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가리지 않고 최저임금 수준의 근로조건으로 일하고 있었다.

▲ 세습 갑질, 불법파견 갑질, 노조와해 갑질 제보도 마찬가지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조합원의 무관심, 노동조합의 관성, 대기업노조에 대한 불신 등 넘어서야 할 장벽이 많다. 당장 우리 조합원들의 임금을 올리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일은 아니지만 한국사회 노동자, 부품사와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자녀세대 청년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는 운동이다. 치열한 토론과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다. 노조와 유성기업지회가 8월 8일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앞에서 ‘유성기업 노조파괴사건 현대자동차 개입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임연철

 

재벌 갑질에 맞선 투쟁

2016~2017년 민주노총과 노동자들은 촛불광장을 만든 주역이었다. 민주노총은 많은 예산과 인력을 ‘박근혜 퇴진 국민행동’(퇴진행동)에 쏟아부었다. 전국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광화문으로 집결했고, 전국 주요 도시의 촛불집회는 민주노총이 없으면 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광장에서 노동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은 재벌의 청부를 받아 해고를 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는 ‘노동개악’을 추진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박근혜 퇴진을 걸고 싸우다 구속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석방의 목소리는 환호받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부터 덧씌워진 ‘귀족노조’ 프레임은 더욱 공고해졌다.

자본의 양극화가 노동의 양극화로 이어졌고, 노조가 있는 대기업, 공공부문이 노동자의 상위 10%를 점하게 됐다. 괴물이 되어버린 재벌이 골목상권까지 잡아먹고, 원하청 불공정거래를 바로잡아야 할 정부는 도리어 재벌의 청부업자 노릇을 했다.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가운데 한 곳이 됐다.

노동운동은 오랜 세월 평등하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다. 산별노조운동은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었다. 산별교섭에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나란히 앉혀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금지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는 것이 산별노조운동의 목표였다. 하지만 대기업을 산별교섭에 끌어내지 못했다. 형식은 산별노조이지만 실질은 기업별 노조로 운영했다. 노동 내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은 좁혀지기는커녕 더욱 확대됐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재벌 갑질 근절이다.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부당내부거래라는 원하청 불공정거래 갑질, 불법과 편법을 통한 총수 일가의 세습 갑질, 정규직을 사용해야 할 자리에 하청·파견노동자를 사용하는 불법파견 갑질, 유성기업의 사례에서 확인한 원청의 계열사와 부품사 노조와해 갑질이 한국사회 재벌의 대표 갑질 행위다.

핵심은 불공정거래 갑질이다. 문재인 정부는 ‘재벌저격수’라고 불린 김상조 교수를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부품사가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원청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행위를 신고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부영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장은 “대-중소기업 간 양극화 개선을 위해 대기업이 다단계 하청거래를 통해 중간에서 8~15%의 통행세를 챙기고,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불공정거래를 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라며 “공정거래법과 하도급법의 전면 개혁과 혁신으로 불공정거래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고, 자동차산업 ‘업종협의체’를 설치해 하도급 거래질서 확립과 임금 격차 등을 논의하자”라고 제안했다.

법과 제도를 바꾸는 일과 함께 원하청 불공정거래가 얼마나 심각한지 실태조사와 제보를 받는 일이 중요하다. 지난해 11월 1일 출범한 <직장 갑질 119>에 갑질 제보가 하루 평균 66건씩 쏟아졌다. 증거가 있고 구체적인 이메일 신고도 하루 평균 20건씩 들어온다. 전문가들이 상담하는 비영리 공익단체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높고, 익명으로 신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노동조합, 비정규직노조, 부품사 노조, 원하청 거래 법률가 등이 공동으로 ‘재벌 갑질 신고센터’를 만든다면 어떨까?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등 이해당사자들이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제보한 부품사와 노동자를 보호하면서 실태조사를 벌이고, 납품단가 후려치기 사례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해 해결하는 선순환 과정을 만들 수 있다면 상당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무서워 신고하지 못했던 2~3차 협력사 노동자들에게 신뢰를 주고, 재벌을 정점으로 갑질이 다단계로 밑바닥 노동자들에게 전가되는 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이 자본과 정권에 의해 오랜 세월 덧칠해진 ‘귀족노조’의 오명에서 벗어나 한국사회 불평등과 불공정을 바로잡는 파수꾼 역할을 할 수 있다.

세습 갑질, 불법파견 갑질, 노조와해 갑질 제보도 마찬가지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조합원의 무관심, 노동조합의 관성, 대기업노조에 대한 불신 등 넘어서야 할 장벽이 많다. 당장 우리 조합원들의 임금을 올리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일은 아니지만, 한국사회 노동자, 부품사와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자녀세대 청년의 노동조건을 향상하는 운동이다. 치열한 토론과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다.

<직장 갑질 119>가 짧은 시간에 사회적 신뢰를 받은 이유가 있다.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려 교도소에 가두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던 촛불의 경험이 평등한 일터에 대한 열망의 원천이 되고 있다. 광장의 민주주의를 일터의 민주주의로 만들고 싶은 직장인들이 용기를 내 <직장 갑질 119>에 제보하고, 사회에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 20년,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는 나쁜 일자리를 양산했다. 취업하기 힘들어졌고, 비정규직이 많아지면서 직장의 민주주의는 거꾸로 후퇴했다. 정부가 기업 노무부서로 전락한 사이, 갑질이 전염병처럼 번져갔다. 직장인들의 한숨과 분노가 점점 커져다. <직장 갑질 119>가 나타나자 갑질 제보가 쏟아졌다. <직장 갑질 119>에서 상담과 제보를 통해 용기를 얻은 직장인들이 온라인모임으로 뭉치고, 노동조합 결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사회 재벌은 괴물이 됐다. 불의한 정권, 부정한 정치 권력을 쫓아낼 수 있었지만 견고한 바벨탑을 쌓은 경제 권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무소불위의 재벌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이재용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삼성의 투자계획이 모든 언론의 1면을 장식하는 나라다. 골리앗에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세력은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뿐이다. 삼성 백혈병에 맞서 의롭게 싸워 승리한 반올림처럼, 한국 노동운동이 재벌 갑질 근절에 나서 싸운다면, 조금은 더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지 않을까?

박점규 _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 / <직장 갑질 119>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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