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도화선이었습니다. 파업을 상상할 수 없던 조합원들이 처음 파업을 했고, 투쟁하면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한 번에 모든 걸 바꾸진 못했지만 싸우면서 조금씩 노동자 권리를 쟁취하고, 민주노조를 세웠습니다.”

도성대 금속노조 충남지부 유성기업 아산지회 부지회장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도화선에 비유했다. 어느덧 30년 전 일이 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그리움과 뿌듯함, 때론 아쉬움이 섞인 표정을 내비쳤다.

1987년 유성기업에 갓 입사해 파업현장을 지켰던 도성대 부지회장에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오랜 어용노조 굴레를 벗어나 당당한 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던 계기이자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

아직도 30년 전 노동자 대투쟁의 기억을 품고 사는 도성대 부지회장을 노조 충남지부 유성기업 아산지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1961년 노조 설립 이후 오랜 어용 역사…생산직 차별 심해

노조 유성기업지회(아래 지회)는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해 7년째 노조파괴에 맞서 싸우고 있다. 많은 조합원이 고통을 호소하고 한광호 열사가 지난해 세상을 떠날 만큼 힘든 싸움 속에서도 민주노조를 지키고 있는 지회지만 지회 설립 이전에 유성기업에 있던 노조는 어용노조였다.

▲ 무엇보다 1987년 파업을 주도하다 해고당한 조합원 세 명을 지키지 못했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30년 전 일을 떠올리며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도 부끄럽다. ‘해고자들은 불순세력이고, 파업을 선동해서 공장이 이렇게 됐다’는 회사 선전에 놀아났다”고 고백했다. 아산=신동준

도성대 부지회장은 “1961년 처음 노조가 생긴 후 오랫동안 어용노조가 집행했다”고 지적했다. 도 부지회장은 “당시에 간선제로 집행부를 뽑았기 때문에 조합원들이 위원장 얼굴도 잘 몰랐다. 한번 위원장 했던 사람이 계속 장기집권했다”며 “임금 협상을 타결하면 타결액에 대한 찬반투표도 안 했다”고 설명했다.

노동조건은 열악했다. 일이 많아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하기 일쑤였고, 여간해서는 잔업, 특근을 빠질 수 없었다. “조퇴 한 번 하려면 일주일 전부터 아프다고 해야 했어요. 아내가 애를 낳아도 ‘네가 애 낳느냐’며 조퇴를 시켜주지 않을 정도였죠.”

생산직과 사무직, 관리직 사이 차별이 심했다. 멀리서 봐도 수습인지 생산직인지 사무직인지 알 수 있도록 색이 다른 모자를 썼다. 수습은 주황색. 생산직은 회색. 관리직은 노란색 모자를 썼다. 작업복도 달랐다. 현장직은 ‘공돌이’ 티가 나는 작업복을 입혔고, 관리직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었다. 부장급 이상은 밥을 따로 먹었다.

특히 부서별 소속장 권위가 대단했다. 소속장이 재량으로 임금을 최대 300원까지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가 소속장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소속장에게 잘 보이려 주말마다 집으로 선물을 싸 들고 갔고, 명절 때 선물을 보냈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소속장 눈치를 보느라 커피를 마음대로 마시지 못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커피 한 잔 마시려다 소속장이랑 눈이 마주치면 커피를 내려놓고 일을 했어요. 눈 마주치고 커피를 마시면 소속장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해서 잔업에서 빼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불이익을 줬죠.”

당시 유성기업에 ▲출근율 90% 이상 ▲아이디어 일정 건수 이상 제출 등 요건을 충족하면 임금 총액의 10%를 더 주는 ‘성실상’이란 제도가 있었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성실상을 받는 사람이 90%, 못 받는 사람이 10% 정도 됐던 것 같다”며 “회사가 그런 식으로 노동자를 길들였다”고 비판했다.

 

1987년 첫 파업으로 직선제 쟁취…해고자 못 지킨 아쉬움

전국을 휩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가 경기 부천의 유성기업지회에 밀려들었다. 지회는 1987년 9월1일 노조 민주화, 집행부 직선제 등을 요구하며 노조 설립 후 36년 만에 첫 파업을 벌였다. 그해 5월 입사해 수습이었던 도성대 부지회장은 파업에 동참해 파업 마지막 날까지 공장을 지켰다.

오랜 어용노조 역사를 깨는 첫걸음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부족한 점이 많았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왜 파업하고, 누가 파업을 선도하는지 잘 몰랐다”고 털어놨다. 노동자끼리 뭉치고, 연대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서 회사를 망친다’는 생각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을 정도다.

▲ 1990년대 중반을 넘기며 유성기업노조에서 민주세력이 우위를 굳혔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민주세력이 어용세력보다 낫다는 사실을 실력으로 증명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어용세력이 집행할 때 직권조인에 가깝게 타결했는데 민주세력은 훨씬 민주적으로 노동조합을 운영했다. 헌신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니 전체 조합원들이 민주세력을 선택했다”고 덧붙였다. 아산=신동준

무엇보다 당시 파업을 주도하다 해고당한 조합원 세 명을 지키지 못했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30년 전 일을 떠올리며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도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그때 우리 공장이 부천의 명소라고 할 만큼 예뻤어요. 공장 담벼락에 빨간 장미가 예쁘게 피어있는데 그 밑에서 복직 투쟁하던 해고자 세 명이 좌판을 펴놓고 양말을 팔았죠.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그 사람들과 말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말도 걸지 않았어요. ‘해고자들은 불순세력이고, 파업을 선동해서 공장이 이렇게 됐다’는 회사 선전에 놀아난 셈이죠.”

도성대 부지회장은 “그때 희생했던 세 명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가장 열심히 활동한 사람을 우리 스스로 버렸다는 죄의식을 항상 느꼈다”며 “특히 지금 해고자이기 때문에 더 미안함을 느낀다”고 후회 섞인 목소리로 고백했다.

노조 설립 36년 만의 첫 파업은 석연치 않게 끝났다. 회사 구석에 갑자기 불이 나고, 공권력이 들어오면서 파업이 끝났다. “증거는 없지만 노동자들은 회사가 불을 질렀다고 생각했어요. 나중 일이지만 1990년 파업도 똑같이 회사 한쪽에서 불이 나면서 끝났습니다. 1987년 파업이 끝나니 이사급들이 다 같이 만세삼창하자고 해서 ‘유성 만세’를 세 번 외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그해 유성기업에 입사한 도성대 부지회장의 삶을 많이 바꿨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당시 소속장이 ‘집에 있으면 나중에 파업 끝나고 부르겠다’고 했는데 자기 말을 안 들었다고 나를 사람 취급도 안 했다”며 “소속장과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1990년대 중반 지나며 민주노조 자리 잡아

지회가 1987년 첫 파업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오랫동안 어용노조였던 노조가 한순간에 민주노조로 거듭나지 않았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1990년대 초반까지 민주세력과 어용세력 사이 경쟁이 대단했다”며 “한 해는 민주세력이 집권하고, 다음 해 어용세력이 집권하는 식으로 번갈아가며 집행했다”고 설명했다. 경선은 기본이고, 많을 때는 7조가 선거에 나올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직선제 도입 초기에 인원이 많은 부서에서 나온 조가 당선되는 일이 흔했다. 도 부지회장은 “조합원들은 검증된 사람이 없고, 다른 부서 사람을 잘 모르니 그냥 자기 부서 사람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부서원이 많은 생산1과가 거의 당선됐다”고 덧붙였다.

1990년 김동암 당시 위원장이 파업을 하다 구속된 틈을 타 부위원장들이 직권조인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때도 1987년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고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파업이 끝났다. 경찰이 조합원 전원을 연행했다. 당시 대의원 총무였던 도성대 부지회장도 부천 남부경찰서로 끌려갔지만 사흘 만에 나왔다.

1990년대 중반을 넘기며 유성기업노조에서 민주세력이 우위를 굳혔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민주세력이 어용세력보다 낫다는 사실을 실력으로 증명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어용세력이 집행할 때 직권조인에 가깝게 타결했는데 민주세력은 훨씬 민주적으로 노동조합을 운영했다. 헌신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니 전체 조합원들이 민주세력을 선택했다”고 덧붙였다.

▲ 1990년대 중반을 넘기며 유성기업노조에서 민주세력이 우위를 굳혔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민주세력이 어용세력보다 낫다는 사실을 실력으로 증명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어용세력이 집행할 때 직권조인에 가깝게 타결했는데 민주세력은 훨씬 민주적으로 노동조합을 운영했다. 헌신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니 전체 조합원들이 민주세력을 선택했다”고 덧붙였다. 아산=신동준

‘외부 사람들이 노조를 망친다’는 조합원들의 생각은 투쟁과 교육 속에서 서서히 변해갔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부천에서 큰 싸움이 있으면 우리 조합원들이 함께 싸웠다”고 자부했다. 유성기업이 부천에 있던 당시 지회는 대흥기계노조, 경원세기노조와 함께 3사 공동투쟁을 벌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설립한 다른 노조의 투쟁에 열심히 연대했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몇 년 동안 여러 사업장에 노조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이때 생긴 노조 사수투쟁에 거의 다 함께했다”며 “그때 유성노조 간부, 활동가 상당수가 당시 다른 사업장에서 활동하던 분들과 결혼했다”고 설명했다.

“유성기업노조가 노동운동에 꽤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대우자동차가 한창 열심히 싸울 때는 젊은 친구들이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죠. 그때 열심히 연대하고 활동했던 경험이 지금까지 자산으로 남아있습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교훈, ‘행동하면 바꿀 수 있다’

도성대 부지회장은 30년 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의미에 대해 “직접 행동하면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1987년 이전 300~500원씩 오르던 임금이 1987년 이후 최대 3,000원 가까이 올랐습니다. 생산직과 관리직 작업복을 통일하고, 식당을 통합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많이 없앴습니다. 직접 행동하면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경험한 거죠.”

도성대 부지회장은 “파업을 어떻게 하는 줄 모르던 사람들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행동하면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며 “2016년 촛불항쟁도 그랬듯 직접 행동하면 현장과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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