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기업과 인권에 관한 실무그룹(UN Working Group on Business and Human Rights, 이하 실무그룹)이 6월8일 열린 35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2016년 5월 한국을 방문한 결과를 보고했다.

실무그룹은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청업체인 유성기업 노조파괴에 개입한 현대자동차에 대해 “기업이 공급망(하청관계) 인권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엔 원칙과 국제노동기준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이번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는 삼성전자 하청업체에서 발생한 메탄올 중독문제, 삼성전자와 LCD 공장에서 발생한 직업병 문제,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의 산재 사망과 노동권 탄압 등을 언급하며 “원청기업의 인권 보호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 자리에 삼성에 스마트폰 부품을 납품하는 공장에서 일하다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한 김영신 씨가 직접 참석하여 삼성전자의 책임을 호소했다.

한국 정부 대표는 원청기업 책임을 강화할 방안에 대해 한마디 언급 없이 “한국 정부는 부당노동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부당노동행위를 저지른 사용자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엄격하게 물리고 있다”는 엉뚱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이행원칙은 법적 구속력 없어…연성 감독 뛰어넘는 조약 제정해야

실무그룹이 활동 바탕으로 삼고 있는 유엔 기업과 인권에 관한 이행원칙(UN Guiding Principle on Business and Human Rights, 아래 이행원칙)은 초국적 기업이 자신의 활동으로 인한 노동권·인권 침해 가능성을 스스로 예측하고 예방하고, 이미 발생한 피해를 구제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책임은 초국적 기업의 글로벌 공급 사슬 전반에 적용된다.

그러나 이행원칙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원칙에 불과하다. “유성기업 노조탄압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는 현대자동차나 “우리는 부당노동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거짓 보고를 하는 한국정부에게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다.

국제노동운동은 초국적 기업 활동을 규제하는 “법적 구속력 있는 조약”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노총과 여러 국제산별노조들은 6월 초 106차 국제노동기구(ILO) 총회 기간 ‘초국적 기업의 인권 실천 점검 의무에 관한 구속력 있는 조약’(아래 조약) 제정에 관한 간담회를 열어 각국 노동조합에 ‘조약 쟁취에 힘을 보태 달라‘고 호소했다.

▲ 유엔 기업과 인권에 관한 실무그룹이 35차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는 삼성전자 하청업체에서 발생한 메탄올 중독문제, 삼성전자와 LCD 공장에서 발생한 직업병 문제,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의 산재 사망과 노동권 탄압 등을 언급하며 “원청기업의 인권 보호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 자리에 삼성에 스마트폰 부품을 납품하는 공장에서 일하다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한 김영신 씨가 직접 참석하여 삼성전자의 책임을 호소했다. 사진=신동준

국제노동운동은 조약이 몇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고 요구한다. 우선 기업이 비재무 보고 시 인권 관련 활동을 보고토록 하는 ‘연성 감독’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초국적 기업은 자기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해외 투자자가 투자유치국 정부를 상대로 이익 침해에 대해 제소할 수 있도록 하는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ISDS)’를 활용할 수 있다. 반면 초국적 기업은 노동권·인권 예방 의무를 어겨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국제노동운동은 초국적 기업이 노동권·인권에 관한 의무를 위반했을 때 기업에 권리 침해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용 면에서 국제인권기준과 국제노동기준을 빠짐없이 포함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강제노동, 아동노동 등 극단의 착취를 제어함은 물론이고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단체교섭권을 포함하는 ‘노조 할 권리’를 글로벌 공급사슬 안의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하도록 강제하자는 요구다.

국제노동운동은 이를 통해 초국적 기업의 글로벌 공급사슬 시스템이 더 이상 전 세계 노동자를 ‘바닥을 향한 경주’로 내몰지 못하도록 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현재 국제법은 국경을 넘는 기업의 노동권·인권 침해를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 초국적 기업은 부품사-하청업체에 단가 압박을 가하면서 이로 인한 노동권·인권 침해는 책임지지 않고 있다. 국제노동운동은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구속력 있는 조약을 영토를 초월해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제노동운동은 조약이 실질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초국적 기업의 노동권·인권침해 사건을 판결할 국제재판소를 요구하고 있다.

 

재벌책임 강화 투쟁으로 인권·노동기본권 준수토록 해야

초국적 기업에 노동권·인권 준수 의무를 부과하고, 글로벌 공급사슬 안의 모든 노동자에게 사용자 책임을 다하도록 강제하는 투쟁은 재벌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국내 투쟁과 연결돼 있다.

삼성, 현대자동차 등 국내 재벌은 ‘공급사슬 안 인권 실천 점검’을 의무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간접고용을 남용하고 부품사 노조파괴를 직접 실행하는 지경이다. 한국 정부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스스로 선언한 대로 “부당노동행위를 저지른 사용자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엄격하게 물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아가 국제 사회가 요구하는 더 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재벌이 인권·노동기본권을 글로벌 공급 사슬 안에서 준수하도록 강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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