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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혼이라도 자본가 놈들과 싸우겠다”[금속열사열전 17] 이영일 열사(경남지부 S&T중공업지회)
이영일‧임종호 열사 추모사업회  |  edit@ilabo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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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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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3일 오전 8시, 공장 식당 2층 옥상에서 이영일 통일노동조합 조사통계차장이 온몸에 시너를 붓고 불을 붙인 뒤 6m 아래로 몸을 던졌다. 동료들이 신음하는 그를 발견하고 곧바로 창원병원으로 옮겼지만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데다 투신하며 머리를 부딪친 이영일 열사는 뇌수술을 준비하던 10시45분쯤 운명했다. 옥상에 죽음을 앞두고 삶을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피운 담배꽁초 2개와 우산, 수첩, 명찰과 사원증, 시너를 담았던 플라스틱 사이다병이 남아 있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아래 전노협)을 결성한 1990년 1월22일, 민정당이 야당이던 민주당, 공화당과 합당해 거대 보수 여당인 민자당이 탄생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전노협을 ‘급진 좌경노동세력’, ‘경제위기와 체제전복을 추구하는 폭력집단’으로 매도하며 탄압했고 자본진영도 노태우 정부와 발 맞춰 대응하면서 탄압을 가했다.

   
▲ 통일노동조합 조합원들이 1990년 5월9일 공장 안에서 이영일 열사 전국노동자장을 치르고 있다.

1990년 통일노동조합(현 S&T중공업지회, 아래 노조)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통일교 재단 소속인 (주)통일은 통일교도를 이용해 노동조합을 공격했다. 노태우 정권은 해고자 복직 등을 주요 요구로 내건 1989년 임단협 투쟁을 공권력 투입으로 진압하면서 현장을 그야말로 초토화했다. 위원장을 비롯한 간부, 조합원 31명이 구속되고, 십여 명이 수배되며 노조 지도력은 공백 상태에 놓였다.

노조는 1월 중순 핵심 조합원을 모아 ‘민주노조사수위원회’를 꾸리고 조직력을 회복하려 안간힘을 다했지만, 통일은 노조가 약해진 틈을 이용해 탄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영일 열사 분신 사건이 터졌다.

이영일 열사가 산화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이영일 열사의 현장 작업대 위에서 작업표 뒷면에 쓴 유서를 발견했다. 5월3일 쓴 유서에 ‘1. 민주노조 사수 2. 임금 12.56% 완전쟁취 3. 구속동지 석방 복직 4. 석방동지 복직’이라고 적혀 있었다. 자취방에서 노트에 적은 열사의 유언도 발견했다.

“마지막 부탁드립니다. 미신은 믿지 않지만 만약 혼이 있다면 원혼이 되어서라도 영원히 저놈들과 싸우겠습니다. 어머님, 형님, 부탁드립니다. 위원장님 및 조합에 부탁드립니다. 저를 화장시켜 주세요. 그리고 단 한 줌의 뼈라도 사내에 뿌려주세요. 영원히 통일 자본가 관리자 문선명, 문성균 이하 모든 놈들과 싸우고 싶습니다. 통일 조합원 및 위원장님, 조합을 영원히 새날이 올 때까지 지켜주세요.

며칠 전에는 노무과 놈이 와서 저보고 조심하라나요. 우습군요. 잘못하면 쇳덩이라도 던질 뻔했습니다. 저녁에는 고향집에 형사가 왔다 갔다는군요. 나만 못살게 구는 줄 알았더니 부모형제까지 못 살게 굴더군요.”

이영일 열사는 1962년 9월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1989년 4월3일 (주)통일에 입사했다. 열사는 1989년 하반기 4공장 매각 철회 투쟁 때 정당방위대원으로 활동했고, 12월부터 노조 조사통계차장을 맡았다. 1990년 2월 대의원으로 당선돼 활동했다. 열사가 입사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노조 활동에 뛰어든 이유는 내성적이지만 잘못을 보면 지나치지 않는 정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특히 공권력 투입과 통일교 재단의 노동자 탄압을 직접 목격하며 노동조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영일 열사는 1989년 하반기부터 회사와 노태우 정부의 탄압에 분노하고,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노조와 지역노동운동 상황을 보면서 답답해했다. 분신하기 하루 전날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5월10일이 어머님 생신인데 형사들이 어머니를 괴롭힌다”고 괴로워하며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동지애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영일 열사는 결국 하나뿐인 생명을 던져 자본과 노태우 정권의 비인간적인 노동탄압에 항거했다.

이영일 열사 분신 직후 조합원 3천여 명이 작업을 거부하고 노조탄압을 규탄하는 집회를 벌였다. 운명 소식을 접한 노조는 즉각 열사 시신을 안치한 창원병원 영안실과 노조 사무실에 빈소를 차리고 시신탈취를 대비해 영안실을 지켰다.

노태우 정권은 전투경찰 7개 중대 9백여 명을 동원해 병원 밖을 봉쇄하고 출입을 막기 시작했다. ‘마산창원 임금인상 및 노동운동 탄압분쇄 투쟁본부’는 5월3일 오후 3시 민주광장 집회를 창원병원에서 열고, 장례는 전국노동자장으로 치르기로 결의했다.

경찰은 2천 명을 증원해 창원병원을 완전히 봉쇄했지만, 소식을 들은 마산‧창원 노동자 1천6백여 명은 자본과 경찰 방해를 뚫고 들어가 병원 안에서 ‘노조탄압 분쇄 및 이영일 열사 추모집회’를 열었다. 노동자들은 마산‧창원 시내 곳곳에서 선전물을 배포하고 백골단과 전경에 맞서 가두시위를 계속했다.

노태우 정권 경찰은 5월4일 새벽 1시30분 무렵 백골단과 특수기동대원 등 3천여 명을 앞세워 열사 시신을 탈취했다. 당시 이영일 열사를 지키고 있던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정당방위대와 통일노조 조합원 2백여 명은 결사항전 태세로 저항했으나 수적 열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영일 열사는 운명한 지 15시간도 안 돼 열사가 그토록 저주하던 적들의 손에 더럽혀지고 말았다.

1990년 5월9일 이영일 열사 시신은 적들에게 빼앗겼지만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3시간에 걸쳐 이영일 열사의 전국노동자장을 열었다. 경찰은 이날 2천여 명을 동원해 공장 주위를 봉쇄하고 외부인 출입을 막는 만행을 저질렀다.

S&T중공업지회는 이영일 열사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경남 양산 솥발산에 추모비를 세우고 매년 5월1일 진주교도소에서 산화한 임종호 열사와 함께 열사 추모제를 열고 있다.

<이영일‧임종호 열사 추모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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