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금속노조는 6월 총파업을 기획하고 있다. 이에 앞선 노동자들의 총파업의 역사를 돌아보며 총파업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총파업의 역사는 1923년 원산의 지역 총파업에서 시작하여, 최초의 전국 총파업인 1946년 9월 총파업을 거쳐 1948년 2월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오랜 단절을 뚫고 지역차원의 1989년 마창노련과 부천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났고, 뒤이어 전국총파업으로 발전한 것은 전노협의 1990년 5월 총파업과 1991년 5월 총파업이다. 노동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의 총파업은 1996・7년 노동법개악저지총파업투쟁이다.

이 가운데 1990년 5월 총파업에 대해 주목해 본다. 그 이유는 5월 총파업이 전노협과 민주노조운동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그 출발이 전노협 소속 노조가 아닌 방송노동자투쟁과 대공장 노동자 투쟁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발전하여 노동자 간의 전국적 연대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또한 총파업에서 전국 조직의 역할을 돌아보는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1990년 전노협은 건설되자마자 조직을 정비도 하기 전에 정권의 좌경급진세력이라는 이념 공세, 지도부의 구속, 업무조사와 전노협 탈퇴공작 등에 맞서 조직을 사수하고 민주노조운동을 지켜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전노협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소속 사업장이 아닌 1990년 4월 KBS노동자들의 방송민주화투쟁, 울산 대공장인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에 대해 지원연대투쟁을 벌이면서 노동자의 연대정신을 발휘했다. 마침내 전체 민주노조운동을 사수하기 위해 5월 총파업을 벌였다. 5월 총파업투쟁은 87년 이래 민주노조운동의 최대 성과로서 노동운동탄압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노동자의 자신감을 회복 시켜준 쾌거였다.

총파업의 시발점 - KBS방송민주화투쟁과 현대중공업투쟁

민자당 정권의 장기집권기도에서 비롯된 KBS방송장악음모에 맞서 4월 KBS노조가 벌인 제작거부투쟁이 한 달 간이나 이어졌다. 이에 전노협은 KBS투쟁 지지성명서를 발표했고, 지지방문을 하거나 지지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KBS노조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반면, 정권의 도덕성과 공권력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들의 사기와 투지는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 1990년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이어 1987년 이래 노동자대투쟁의 선봉이었던 2만여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계속되는 지도부의 구속에 맞서 4월 25일 노조사수투쟁을 벌였다. 투쟁의 확산에 겁을 먹은 정권은 파업 4일 만에 즉각 공권력을 투입했으나 파업노동자들은 노조지도부를 중심으로 ‘골리앗’농성에 돌입했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울산 현대계열사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4월 28일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되자, 4월 29일 전노협은 비상중앙위원회를 개최해 5월 총파업을 결의하고 전노협 선봉대를 울산에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전노협 선봉대는 총6개 지역에서 114명이 파견되었다. 각 지노협에서 파견한 선봉대 외에 공개모집에 참가한 학생들을 포함하면 대략 200여 명 가량. 파견된 전노협 선봉대는 5월 5일에 이어 5월 6일 사천세대에서 전노협 깃발을 들고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이들은 현대중공업 경찰 봉쇄선을 물리력으로 뚫고 전노협 깃발을 휘날림으로써 골리앗 농성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역시 전노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전노협 선봉대의 투쟁은 이후 울산지역에서 전노협의 살아있는 연대정신의 표본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각 지노협은 현대중공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과 함께 공권력 침탈 항의투쟁을 시작했다. 가장 선도적으로 투쟁을 벌인 마창노련의 노조들은 현대중공업노동자들이 4월 25일 파업에 돌입하자 4월 26일부터 5월 1일까지 단사별 잔업거부에 들어가 강력한 연대투쟁의 결의를 보여주었다. 또한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 KBS 현중 사수투쟁’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4월 26일 하루 동안 15개 노조에서 조합원 및 간부를 포함하여 총 5,665명이 중식집회에 참가했다. 특히 4월 28일에는 현중 공권력 진압소식에 분노한 (주)통일과 대림자동차 노조들은 중식시간에 일제히 규탄대회를 열였다. 퇴근 후 경남대에서 약 3천여 명이 모여 집회를 가지고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노동부 마산지방사무소 내부를 불태우고 유리창을 깨버렸다.

1990년 5월 전노협의 총파업 투쟁


전노협의 5월 전국 총파업 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이 탄압을 뚫고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민주노조운동의 전진과 후퇴의 분수령’이자 ‘전노협의 사활을 건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투쟁은 1987년 이래 민주노조운동의 조직적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노조들이 전국적으로 통일된 요구를 걸고 투쟁을 전개하는 조직적 연대파업이었다.

총파업 첫날인 5월 1일, 전노협은 서울대에서 ‘세계노동절 1백1주년 기념 노동운동탄압 분쇄 및 민중기본권 쟁취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를 가졌고, 부산 인천 마산 등 전국 14개 지역에서는 현대 중공업 등 노조탄압을 규탄하는 집회를 가졌다. 전노협은 이날 채택한 투쟁결의문에서 “현대중공업에 대한 경찰력 투입 등 정권의 폭력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불길은 오히려 거세게 타오르고 있다”며 “총파업 투쟁으로 노동운동 탄압 분쇄하고, 단병호 위원장 등 구속노동자를 구출하자”는 등 4개항을 결의했다.

마창노련, 부노협, 부산노련, 인노협, 전북노련, 성남노련, 경기노련 등 각 지역의 지노협들이 총파업투쟁을 벌이며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였다. 마창노련은 수출지역 7개, 창원공단 19개 등 총 26개(조합원 2만3천명) 노조가 총파업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단위노조 별로 집회나 출정식을 마친 노동자들이 대열을 지어 속속 수출지역 후문 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회 장소인 민주광장 근처까지 집결한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제지하는 경찰의 봉쇄를 뚫지 못하고 분산적으로 거리시위를 전개했다.

부노협의 경우 ‘세계노동절 101주년 부천노동자대회’ 개최장소인 부천공전을 경찰이 원천봉쇄 하자 분노한 노동자들을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해 파출소 2곳을 타격하고 전경차 1대를 전소시켰다. 또 현대자동차, 현대증권, 민자당 지구당 사무실을 타격했다. 타격투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춘의파출소 경찰들은 칼빈 소총 5발을 시위노동자들에게 발포하기 까지 했다.

전노협의 총파업투쟁 결정이 내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느 정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4월 30일 울산 12개 현대계열사의 파업을 필두로 5월 1일 마창과 부산에서 시작된 총파업은 전국 노동자들이 전면파업, 부분파업, 집단조퇴, 중식시간 총회투쟁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에 참여했다. 심지어 구속노동자들까지 교도소와 구치소에서 단식농성으로 투쟁에 참여하여 역사적인 전국총파업을 기록했다.
5월 1일 하루 동안 전국 155개 사업장, 12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여했고, 서울지하철노조는 1일 하루 동안 무임승차를 강행했다. 투쟁 분위기는 방송사노조들의 연대 제작거부투쟁으로 인해 더욱 확산되었다.

5월 3일부터 수도권이 참여하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투쟁전선을 형성했다. 5월 3일에 진행된 총파업에 서노협 소속의 구로공단에서는 18개 노조, 1천5백여 명의 조합원이 현대중공업에 대한 공권력투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나우정밀 등 3개 업체 조합원 7백여 명은 “노동운동 탄압분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각 사업장을 출발, 차도를 따라 시위를 벌이다 이 가운데 3백여 명이 경찰버스에 태워져 시흥ㆍ부천 등지로 강제 격리 분산됐다.
5월 4일 인노협의 총파업에는 총38개 노조, 5천여 조합원이 파업 또는 총회형태로 참여했다. 저녁에는 노동자들은 부평시장, 청천시장 등 곳곳에서 산발적인 가두시위와 집회를 열었고, 경찰에 맞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투쟁을 벌였다. 총파업은 5월 3일에는 81개 노조, 9만 1천여 조합원이 참여했고, 5월 4일에는 전국적으로 155개 노조, 12만 명이 참여했다.

5월 9일 전국에서는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의 구호와 거센 함성이 거리를 뒤덮었다. 물가폭등과 집값 상승 등으로 누적된 국민들의 분노가 불을 뿜으면서 서울에서는 5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곳곳에서 경찰력을 무력화시키고 시위에 참가한 이들은 ‘전노협 사수’를 부르짖었다. 또 부천에서도 부천 역 소신여객에서부터 노동자・ 학생들이 가두로 나와 도로를 점거한 채, “민생파탄, 물가폭동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 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벌였다. 이 날은 노동자들이 부천역을 점거하고 투쟁할 때 시민이 박수로 호응해 주고, 시위도중 최루탄이 날려도 흩어지지 않고 가두시위에 관심과 열의를 보였다. 이는 물가폭등, 주택 값 폭등 등을 거치면서 시민들이 민자당에 대한 분노로 시위대를 지지한 것이었다.

조합원에서 노동자 계급으로

이러한 전국 총파업투쟁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우선은 정권의 탄압이 모든 민주노조에게 가해지고 있고 또 가해질 것이라는 현실인식에서 지역에서 공동투쟁의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전국 투쟁을 지도할 지도부인 전노협이 없었다면 총파업이 가능했을 까라는 점에서 전노협의 존재가 더 중요성을 갖는다. 전노협은 조직구성에서는 기업별 노조의 협의체인 지노협을 기반으로 건설되었다. 그럼에도 정권의 탄압에 맞서 기업별 노조체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전국 총파업 투쟁을 벌인 것이다.

총파업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선 총파업으로 전노협은 사수되었고 나아가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더 중요한 성과는 아래 전노협 간부의 증언처럼 탄압에 대해 조직을 사수하는 길은 투쟁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기업별 노조체계 속의 노동자들이 투쟁과정에서 공동의 적인 정권에 대해 인식하고 계급적 단결을 위한 산별노조의 필요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총체적인 탄압에 계급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것에서 총파업을 결의한 것은 한 두 지도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지역적 요구가 분명히 있었다. 그 요구는 첫 번째는 총파업을 하지 않았을 때 전노협을 사수해 낼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KBS와 골리앗투쟁에 대한 대응으로서 했었지만, 그렇게 투쟁하지 않았으면 중앙뿐만 아니라 지역조직이 버티기 어렵다는 생각이 있었다...총파업의 결과는 이전까지 막연했던 자본가 권력에 대한 본질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고, 나아가 계급적 단결의 중요성을 깨닫고 산별건설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본다...총파업에 참여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기업별노조의식에서 새로운 산별노조에 대한 관점들로 변화가 가능했겠는가.”

유경순 /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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