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여 명이 모였던 10월29일 첫 촛불집회 때는 누구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촛불을 들 줄 몰랐다. 12월17일 8차 촛불집회까지 8백만 명이 넘는 시민이 촛불을 들었고 12월3일 6차 촛불집회에는 1987년 6월 항쟁을 뛰어넘는 232만 명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함께 외쳤다. 촛불의 힘은 끝내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이끌었다. 하지만 박근혜 탄핵과 노동개악,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 박근혜 정책 폐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노조 선전홍보실이 12월20일 서울 중구 노조 사무실에서 이제까지의 박근혜 정부 퇴진 투쟁을 돌아보고 조직노동의 역할과 과제를 모색하는 ‘박근혜 퇴진 투쟁 평가와 과제’ 좌담회를 열었다. 이날 좌담회는 김형석 선전홍보실장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김유진 경기지부 총무부장, 김정희 충남지부 교육선전부장, 정홍형 부산양산지부 조직부장, 백일자 노조 문화부장 등이 토론자로 함께했다.

 

“민주노총, 촛불집회 싹 틔우는 씨앗 역할”

김형석 노조 선전홍보실장(아래 김형석): 촛불집회가 어느새 8차까지 왔다. 각 지역 상황과 분위기를 좀 알려 달라.

김유진 경기지부 총무부장(아래 김유진): 경기지부는 안산, 안성, 평택, 수원역에서 평일에 촛불집회를 한다. 주말에는 서울로 온다. 사업장별로 조합원들이 몇 명이나 올지 파악해서 버스를 빌리는데 막상 버스를 빌리고 나면 애초 파악한 것보다 인원이 훨씬 많다. 조합원들이 동네 단골 술집이나 미용실에서 ‘이번 주에 촛불집회 간다’고 하면 사람들이 ‘나도 가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데려오는 사람이 많다.

정홍형 부산양산지부 조직부장(아래 정홍형): 부산은 9월부터 매주 수요일 시국대회를 열었고, 10월29일 1차 촛불집회 이후에는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아래 퇴진행동)에 참가하는 단위들이 요일별로 나눠서 매일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12월3일에 15만 명 정도가 모였는데 1987년 6월 항쟁만큼 모인 것 같다. 중고등학생, 대학생, 가정주부, 상인 등 일반 시민이 많고, 조직노동자들은 가장 많이 참여했을 때도 10%를 넘지 않았다.

김정희 충남지부 교선부장(아래 김정희): 충남은 천안, 온양, 공주, 보령, 청주 등 여러 지역에서 촛불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 천안은 인구가 60만인데 집중해서 조직한 11월30일 촛불집회에 5천 명 왔다. 노조 조합원이 5백 명 정도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합원 스스로 발언할 역량 키워야

김형석: 조직노동이 주력 대오는 아니지만, 어느 지역에서나 초기에 촛불집회의 싹을 틔우는 씨앗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조직노동자의 힘이 가장 필요한 시점에 가장 조직된 대오가 왜 제 역할을 못 할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예를 들면 시민들은 자유발언을 하겠다며 200명씩 줄 서서 기다리는데 우리 조합원들은 자유발언을 안 한다.

▲ “우리 조합원이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자기주장을 말하는 훈련이 안 됐다. 자발적 분노로 참여한 학생, 시민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발언하기를 꺼린다는 느낌이다. 그동안 우리 집회문화가 구성원의 자유로운 생각과 발언을 모아내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대표자들이 발언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그걸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합원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육성할 필요가 있다.” 사진 맨 왼쪽 정홍형 부산양산지부 정홍형 조직부장. 사진=신동준

정홍형: 우리 조합원이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자기주장을 말하는 훈련이 안 됐다. 자발적 분노로 참여한 학생, 시민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발언하기를 꺼린다는 느낌이다. 그동안 우리 집회문화가 구성원의 자유로운 생각과 발언을 모아내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대표자들이 발언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그걸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합원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육성할 필요가 있다.

백일자 노조 문화부장(아래 백일자): 비슷한 고민이 있다. 조합원들은 간부가 아니면 평소 집회에서 발언할 기회가 없다. 그런 조합원에게 ‘지금은 판이 열렸으니 마이크를 잡으라’고 하면 과연 가능할까.

김정희: 자유발언 말고도 시민들은 복장이나 피켓도 만들어오고, 정말 축제처럼 즐기는 데 비해 조합원들은 자발성이 많이 부족하다. 머릿수 채우면 자기 역할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번은 지회 교선회의에서 ‘우리도 시민들처럼 피켓을 만들어오라’고 했는데 다스지회 한 군데만 만들었다.(웃음) 매직으로 그린 촌스럽고 투박한 피켓이었지만, 어떤 피켓보다 예쁘고 메시지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조합원들의 자발성을 의식적으로 끌어내야 하는데 몇 명이 왔는지에만 관심을 갖다 보니 집회할 때 조합원들을 자꾸 동원하려는 경향이 있다. “”

 

노동자, 나의 투쟁으로 삼을 의제 만들자

백일자: 조직노동자가 일반 시민보다 덜 분노하는 것 같다는 지적이 나왔는데 사실 조직노동자는 이제껏 계속 분노하고 싸워왔다. 세월호 참사나 작년 민중총궐기 때 우리는 이미 열심히 싸웠다. 지금 드러나는 사실들이 특별히 조직노동자들의 분노를 더 끌어낼 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정희: 우리가 그동안 완강히 싸웠던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시민들과 조합원들이 느끼는 온도 차이도 있다. 96년~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을 할 때와 비교하면 조합원들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 그때는 우리 조합원들이 시민들 반응 없이도 엄청나게 분노했다. 그런데 지금 현장은 너무 조용하고 수동적이다.

정홍형: 김정희 동지 말처럼 조합원들이 96년~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 때는 진짜 내 문제라고 생각하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에 비해 올해 11월30일 민주노총 총파업 때는 그만큼 필요를 못 느끼는 조합원들이 많았다. 우리 조합원들에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의 본질은 뭐고 이 투쟁의 의미는 뭔지 정확히 인식시키는 과정이 부족했던 측면이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이제까지 우리가 해왔던 투쟁과 연결 지어 설명하고 그를 바탕으로 이후 우리 과제를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우리는 항상 그런 부분에서 조금씩 뒤처져왔던 것 같다. 폭발적 계기가 있으면 이야기하는 수준이지, 그 전 과정에서 우리가 할 일을 잘 못 찾고 있다. 11월30일 민주노총 총파업도 정세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뒤차를 탄 모양새였다. 시민들 분노에 불을 지르고 투쟁을 확산시키기보다는 ‘우리도 총파업했다’고 면피하는 양상이었다. 그런 부분을 되짚어봐야 한다.

김형석: 현재 국면을 어떻게 봐야 할지도 얘기해보자. 지금 상황을 체제 자체를 바꾸는 혁명적 상황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정홍형: 지금이 체제를 뒤엎는 혁명은 아니고, 시민들이 기존 정치 질서를 갈아엎는 과정이라고 본다. 지금 흐름을 보면 시민들이 두 번 다시 새누리당 같은 정치행태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노총의 역할은 뭘까.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촛불집회 동력이 떨어지니 민주노총이 최후의 보루로 역할을 해야 하지 않냐는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데 거기서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민주노총이 계속 밑불을 지피면서 동력을 유지하고 선거제도 개혁, 최저임금 인상, 재벌개혁, 산별교섭 법제화 등 의제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의 정체성과 의제로 판을 열어가야

김형석: 민주노총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과제는 뭘까.

김유진: 민주노총이 꼭 시민들에게 지도부로 인정받아야 할까? 시민들이 저렇게 많이 모여도 탄핵소추안을 가결하는 것은 결국 국회의원 3백 명이고,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은 헌법재판소다. 그런 것은 민주노총이 주도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보다는 촛불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노조를 만들고, 가입하면 자기 직장에서 질서를 바꿔 갈 수 있지 않을까. 캔커피에 금속노조 스티커라도 붙여서 나눠주고 ‘지금이 노조를 만들 기회다’라고 선전해 금속노조 이미지를 좋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가장 강한 무기는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이 커지면 뭔가 바뀌지 않을까.

백일자: 조직노동이 꼭 운동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쟁이 더 확산되고 커지려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정치적 지도부’라고 표현하고 싶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 민주노총이 시민들에게 박수 받고, 지도부로 인정받은 순간이 있었다.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결정했을 때다. 노동자가 지금처럼 그저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할 게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재벌문제나 비정규직 등 노동의제를 확산시키면서 그 의제를 중심으로 판을 열어가야 한다. 지금 광장에 무수히 많은 주인이 나와 있는데 노동자도 주인일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 촛불집회를 8차까지 했는데 본 집회에 오른 조직노동 발언은 갑을오토텍이 유일했다.

▲ “내 안의 박근혜, 내 옆의 최순실에 분노해야 한다고 일상의 민주주주의를 지적한 발언이 화제가 됐다. 우리 금속노조 안에도 가부정적인 조직문화가 강하다. 금속노조가 우리 안의 문제를 너무 방기해온 것은 아닌지 이번 촛불집회를 계기로 금속노조 내부의 민주주의도 함께 고민하고, 성찰해봤으면 한다.” 사진 왼쪽부터 김정희 충남지부 교선부장, 백일자 노조 문화부장, 김형석 노조 선전홍보실장. 사진=신동준

김유진: 고민 지점이 좀 다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금속노조 내부의 성찰이다. 올해 노동자대회에 중고등학생이나 시민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그때 무대에 오른 조합 간부들은 ‘노동자들이 이제까지 정말 열심히 싸웠고, 그래서 지금 같은 상황이 생겼다’는 자화자찬만 했다. 집회에 온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에게 발언 기회를 줘야 사람들이 ‘민주노총이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발언의 장을 열어주고, 미래세대를 위해 저런 투쟁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노조가 시민 정서를 못 따라가는 것 아닌가 싶다.

김정희: 공감한다. 이제까지 금속노조가 잘해왔다는 자부심에 도취돼 시민들에게 폭을 여는 데 인색했던 것 같다. 얼마 전 이제는 없어진 사업장 조합원들을 만났다. 그 조합원들은 민중총궐기 때부터 매번 왔는데도 깃발이 없으니 갈 곳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10년 이상 민주노총 조합원이었고 노조를 부러워하면서도 갈 곳이 없더라는 거다. 정말 미안하고 이제껏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시민들이 보는 금속노조의 모습이 아닐까.

 

탄핵인용 후 민주노총 정치일정에 개입해야

김형석: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이번 촛불집회 중 한 번은 금속노조가 행진을 하는데 다른 단체가 지나갈 때는 같이 행진하던 시민들이 우리가 지나가니 박수를 치고, 사진은 찍지만 행진을 같이 하지는 않는 모습을 봤다. 시민들이 바라보는 금속노조는 같이 하기에는 너무 먼 대상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달라.

정홍형: 광장의 요구는 이미 시민들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것과 별개로 뭔가를 요구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외치는 구호들, 즉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 부역자 처벌, 전국경제인연합회 해체 등을 그대로 외치면 된다. 다만 그 다음을 고민 안 할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인용하면 정치일정이 급박하게 돌아갈 텐데 민주노총이 흐트러짐 없이 정치일정에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김유진: 경기지부는 지금 사업장마다 10명 정도에 긴급설문을 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생각하는 우리 삶의 적폐가 뭔지 물어봤는데 다들 답변을 길게 쓰더라. 이런 설문조사 등을 통해 조합원들이 생각하는 적폐가 뭔지 모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백일자: 촛불의 힘으로 탄핵소추안 가결까지는 끌어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도 헌법재판소나 정치권에만 맡길 수는 없으니 계속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조직노동자들이 촛불의 선두에서 투쟁해야 한다.

김정희: 진주에서 온 19세 여학생 김다운 양이 “가부정적이고 폭력적인 가장, 반 학생 전체의 의견이 아닌 친한 친구 의견만 듣는 반장, 아르바이트생을 착취하는 점장 등 우리 주변에도 박근혜, 최순실 같은 사람이 많다”며 “내 안의 박근혜, 내 옆의 최순실에 분노해야 한다”고 일상의 민주주주의를 지적한 발언이 화제가 됐다. 우리 금속노조 안에도 가부정적인 조직문화가 강하다. 금속노조가 우리 안의 문제를 너무 방기해온 것은 아닌지 이번 촛불집회를 계기로 금속노조 내부의 민주주의도 함께 고민하고, 성찰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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