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년간 한국 노동운동이 역동적 변화를 겪는 동안 국제정세 역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20세기말 냉전체제의 해체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 속에서 한국 노동운동은 더 이상 과거처럼 분단체제 내의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세계정세와 국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좌파정치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며 발전했다.

 

사회주의 진영 해체 이후 총체적 위기

1989-1991년 러시아와 동유럽의 격변으로 냉전시대(1948-1991)가 끝나면서 세계 노동운동과 좌파정당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러시아와 동유럽 사회는 급속히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됐고 과거 사회주의 체제를 지배했던 공산당과 노동자 정당들은 대부분 해체됐다.

소련을 추종했던 서유럽 공산당과 좌파정당들도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영국 공산당은 당 자체를 해산했고, 이탈리아 공산당은 아예 사민주의 정당으로 변신했고, 프랑스와 스페인 공산당은 살아남았지만 정치적으로 주변화 됐다.

공산당과 경쟁관계에 있던 사민주의 계열의 중도좌파 정당들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탈계급적 중도세력으로 변신했다. 이른바 ‘제3의 길’을 주장했던 영국의 신노동당(New Labour)이 대표 사례다.

▲ 2008년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던 그리스에서 소수정파에 머물던 새로운 좌파정당인 급진좌파연합(Syriza)이 2015년 마침내 집권했다. 스페인에서는 인디그나도스 운동에서 뿌리를 둔 포데모스(Podemos)가 새로운 유형의 반긴축 좌파정당으로 등장했다. <자료사진> AP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반동적 공세 앞에서 노동운동은 방어에 급급했고, 전통적으로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좌파정당들은 무력화됐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계급대표성 위기가 도래했다. 이른바 제도정치 내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사라지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반세계화운동의 성장

1990년대 후반부터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 세계 곳곳에서 시작됐다.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연금개악에 저항하는 총파업을 벌였다.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의 밀레니엄 라운드를 저지한 ‘시애틀 전투’를 통해 반세계화운동이 등장했다.

200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은 몇몇 나라에 국한하지 않은 전지구 운동으로 발전했다. 시애틀에서 퀘벡, 제노바까지 연이은 국제 시위의 물결이 국제무역질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저지했다. 동시에 이를 넘어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구호 아래 세계사회포럼(WSF)이 결성돼 세계 민중운동과 사회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2001년 9.11 테러로 세계에 공안국면이 형성됐지만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반세계화운동은 미국 부시정권이 추진하는 이라크 전쟁에 맞서 국제 반전운동으로 발전했다. 2003년 2월15일 전세계 수백개 도시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동시다발 시위에 3천만 명이 참여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핑크타이드, 선거정치의 지평을 열다

세계에 반신자유주의 전선이 형성되는 가운데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례없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1998년 말 베네수엘라에서 우고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시작된 볼리바르 혁명은 2002년 쿠데타와 역쿠데타, 석유총파업, 2004년 소환투표를 거치면서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했다.

1973년 칠레 9.11쿠데타의 아픈 기억이 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선거를 통한 집권이 현실이 됐다. 2002년 브라질 노동자당(PT)의 룰라, 2004년 우루과이 타바레 바스케스, 2005년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 칠레 미첼 바첼레트, 2006년 에콰도르 라파엘 코레아, 니카라과 다니엘 오르테가 등 남미대륙 대부분을 좌파 정부가 지배하는 ‘핑크타이드’가 출현했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전쟁에 발이 묶여있는 동안, 미국의 뒷마당인 라틴 아메리카에서 거대한 정치 변화가 발생했다. 20세기 내내 칠레를 예외로 하면 선거를 통한 좌파의 승리는 불가능했다는 역사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좌파정부의 연이은 출현과 이들의 남미대륙 연대는 엄청난 중요함이 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와 새로운 좌파정치의 실험

2008년 공황을 계기로 지난 30여 년간 별다른 변화가 없던 유럽과 미국에서 새로운 대중운동과 함께 정치지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2012년 스페인에서 경제위기에 저항하는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 인디그나도스, 미국에서 벌어진 1%에 맞선 99%의 월가점령운동 등 경제위기 시대의 반긴축 운동이 등장했다.

2008년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던 그리스에서 소수정파에 머물던 새로운 좌파정당인 급진좌파연합(Syriza)이 2015년 마침내 집권했다. 스페인에서는 인디그나도스 운동에서 뿌리를 둔 포데모스(Podemos)가 새로운 유형의 반긴축 좌파정당으로 등장했다.

2015년 영국에서 무명의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대표경선에서 승리하면서 노동당을 사회주의 정당으로 변화시키려는 정치혁명을 이끌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무명의 사회주의자인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가 99%를 위한 선거운동을 펼치면서 민주-공화 양당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좌파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냉전체제 종식 이후 총체적 대표성 위기에 처했던 노동운동은 반신자유주의-반긴축 투쟁을 통해 정치지형 재편과 새로운 주체형성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아직 20세기 좌파운동의 역동성에 다소 미치지 못하지만 세계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민중의 대안을 건설할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노력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원영수 <국제포럼>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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