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생명체의 본능에 명백히 반하는 행위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행위는 오직 인간만이 한다. 자살은 인간만이 행하는 특별한 실존의 결단이다.

자살이 한국인의 사망원인 5위 안에 늘 있다는 점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중세시대에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회 혁명을 위해 그야말로 순수한 실존의 결단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일은 있었다. 불행하게도 현대 사회에서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사실상 ‘결단을 당한’ 자살이 늘고 있어 문제다.

 

자살, 살인적인 노동시간, 노동 스트레스가 요인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14년 기준 2,124시간. OECD국가 2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한국의 살인적 노동환경은 익히 알려져 있다. 터무니없이 낮게 산정한 기본급과 통상임금 탓에 노동자들은 잔업과 휴일특근을 최대한 많이 해야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잔업, 특근은 노동자들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지 오래다. 근로기준법대로 8시간을 근무한 뒤 ‘정상 퇴근’을 하는 것이 ‘칼퇴근’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고,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정치인의 구호가 전 국민의 공감을 얻는 만성 장시간 노동 사회. 노동자들이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라곤 ‘업무’ 외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에서 노동자는 잠자는 시간 빼고 인생 대부분의 시간에 노동을 한다. 이런 노동자들이 만약 스트레스로 자살에 이르렀다면 이는 필시 노동과 관련한 스트레스가 그 이유다. 노동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 업무상 재해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근로복지공단은 근골격계질환 만큼 자살에 대해 산재로 인정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 법률에 의해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근로복지공단이 마치 민간 보험회사 마냥 어떻게든 보험급여 지급을 줄이려 하고 있다. 한광호 열사의 형인 국석호 유성기업 영동지회 조합원이 지난 9월3일 ‘한광호 열사 정신계승, 갑을-유성 노조파괴 분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모든 조합원들이 이길 것을 알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반드시 승리로 보답하겠다”고 각오를 밝히고 있다. <아이레이버> 자료사진

근로복지공단이 자살을 업무상재해로 인정하지 않는 주된 근거는 소위 ‘사회평균인 기준설’이다. 대법원 2012. 3. 15. 선고 2011두24644 판결은 “…당해 근로자가 업무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는 ‘사회평균인 입장’에서 앞서 본 모든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이 판결의 ‘사회평균인 입장’ 부분을 자살 산재사건에서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고 있다.

업무상 질병이나 사고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회평균인’이 아닌 ‘근로자 본인 기준’이라는 것이 본래 대법원의 확립된 판결이었다. 위 대법원 판결은 기존 대법원의 입장에 어긋나는 판결이다. 판결 자체가 상당한 모순점을 안고 있다. 위 대법원 판결은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에 대해 ‘사회평균인 입장’을 고려해야한다고 하면서도, “…자살 원인이 된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업무에 기인한 것인지는 ‘당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 등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이라고 판시하고 있다. ‘정신질환’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종전과 마찬가지로 ‘근로자 본인 기준설’을 적용하고 있다. 업무상 스트레스로 정신질환이 발생하면 산재에 해당하지만, 자살에 이르면 ‘사회평균인 기준’이라는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사실 “사회평균인 입장에서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라는 의미는 자살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견해로 보인다. ‘사회평균인’이라 함은 정규분포에서 가운데쯤 있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일 텐데, 자살은 애초에 ‘사회평균인’이라면 선택할 수 없는 특별한 실존의 결단에 해당한다. 정신과에서 ‘사회평균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사회경제적 공황상태와 같은 아노미성 자살의 경우를 들고 있고, 이러한 상황은 애당초 노동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결국 자살에 대해 ‘사회평균인 기준설’을 들이대는 판단은 자살 자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런 논리라면 한 사업장 내에서 20%의 노동자가 동일한 질병을 얻었더라도, ‘사회평균인’인 정규분포 가운데에 있는 노동자들은 그러한 질병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이 질병은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상한 결론 도출도 가능하다.

 

“자살도 업무상 재해”, 바뀌는 대법원

다행히 대법원도 이러한 모순점을 인지한 것인가. 요즘 ‘사회평균인 입장’이란 말을 언급하지 않고 ▲업무상 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우울증세가 악화되고 ▲업무 외 다른 요인으로 인해 이와 같은 증상 및 뒤이은 자살에 이르렀다고 볼만한 근거가 없는 경우 ▲비록 망인의 성격 등 개인적 취약성이 자살을 결의하게 된 데에 일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업무상재해로 봐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대법원의 견해를 받아들여 마땅히 자살도 산재 승인을 적극 검토해야 하나 관습처럼 불승인을 반복하고 있다. 심지어 노동자가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자신들의 패소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법원의 조정조차 잘 받아들이지 않으며 패소 후 항소로 대응하고 있다. 재판이 무의미하게 길어지면서 유족들의 고통은 커진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노동자가 일을 하다 다치거나 병들면 신속히 보상하려는 목적에서 제정했다(산재보상법 제1조). 근로복지공단은 이 법에 따라 만들었으므로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게 보상하여… 근로자 보호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현실에서 근로복지공단은 ‘신속한 보상’은 뒷전이고, 명백한 사고성 재해가 아닌 한 재해가 ‘업무와 관련이 없다는 점’을 증명하는데 역량을 집중하는 듯하다. 법률에 의해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근로복지공단이 마치 민간 보험회사 마냥 어떻게든 보험급여 지급을 줄이려 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이 노동자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이유다.

김두현 금속법률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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