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활동가에게 자신이 현재 몸담고 있는 운동이 노동운동인지 혹은 노조운동인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간혹 묻곤 한다. 물론 대답은 각양각색으로 다양하지만 많은 이들에게서 성실함을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곤혹스런 표정을 짓기도 한다. 왜냐면 자신의 정체성을 노동운동가로서 규정하기보다 노조활동가로서 인정하기가 속은 편하지만, 뭔지 모를 부자연스러운 불쾌감이 들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한번 곰곰이 되씹어 보면 영 뒷맛이 개운찮으면서 목구멍에 가시 걸린 듯이 무언가 불유쾌한 기분만 돋우기도 한다.

노동운동, 노조운동: 단순한 말의 차이?

노동운동과 노조운동이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 동의어가 아니지만 대립적인 반의어도 결코 아니다. 두 개념은 단순한 말의 차이만이 아니라 추상성과 구체성이라는 범주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노동운동이라는 말은 사회운동의 한 부문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체제의 변화를 주도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노동운동이란 말의 사용에는 기존 권력과 사회경제체제에 반기를 들거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주체와 함께 노동운동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변혁의 불가피성이라는 객관적 조건이 어우러져 있다. 이에 반해 노조운동이라는 말은 노조조직을 통한 운동이고, 노동자계급을 대표는 하지만 노동자 전체를 조직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운동이다. 게다가 노동운동이 노조운동과 단체운동이라는 범주들로 분화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노조운동은 노동운동의 하위범주이고 한 부분을 이룬다.

노조운동과 노동운동의 차이는 목적과 이념적 지향성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동운동의 성격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도 공통분모가 존재하지만, 노조운동은 노조가 처한 외적 조건과 환경에 따라 합법화와 제도화에 대한 지향의 정도는 국가별로 다를 뿐만 아니라 노조운동의 방식과 내용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고 있다. 물론 개별 국가차원에서 노조운동은 사회발전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방식과 내용의 차이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이 지향하는 사회변혁성이라는 목적에 노조운동 역시 모순적이지 않아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노조활동가들이 곤혹스러운 심정에 빠져 든다.

활동으로 전락한 운동

누군가 노조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간에 자신이 운동에 복무하고 있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사회변화에 대한 믿음과 새로운 사회가 지금보다 나을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신념과 믿음을 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일상적으로 필요한 일들만 채워가는 활동만을 반복하는 경우, 그 일은 시스템 유지를 위한 단순반복 노동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노조업무가 운동성을 가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 시기와 필요에 따라 하는 일에 불과하다는 자조감에 빠져드는 활동가들이 우리 주위에 많아 보인다. 임투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더라도 그 결과는 이미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게 현실이다.

노조원들의 권익보호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고충처리 문제는 마치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또 다른 탐욕으로 비치기도 할 만큼 의미가 왜곡된 느낌마저 준다. 많은 조합원들의 관심은 고용안정이라는 의제에 쏠려 있는 현실에서 일자리를 지키려면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지극히도 간단한 진실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한다면 과연 지나친 억측일까?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려면 일을 너무나 많이 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부터 줄여야 하는 것이 해답이고, 그래야 노조운동이 사회변혁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다.

운동의 복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에서 노조운동의 주체여야 할 당사자는 운동을 하고 있다고 느끼기보다 지극히도 일상화된 노조활동만 기계처럼 반복하는 모습에서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지'라는 근본적인 의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기고 있다면, 이것 역시 지나친 과장일까? 현재 자신들이 누리는 권익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정규직 조합원, 자신들이 누리는 권리가 다른 노동자들에게 전파되지 않는 현실에는 눈조차 돌리지 못하는 노동자, 노동조합이 지닌 미래지향성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철저히 현실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보수지향성으로만 치우친 노조간부들에게 노조의 운동성을 논할 수는 없다. 더 이상 운동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어려운 현실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초라함과 우울함 그리고 울분을 가진 활동가들에게 노동운동의 복원을 기대한다면, 이것 역시 황당한 희망일까?

이종래 / 한국노동운동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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