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공론장으로 남을 수 있을까. 38명의 야당 의원들이 무려 9일 동안 192시간25분에 걸쳐 세계 최장기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이어가는 동안 한국의 공룡 미디어들이 보인 모습을 보면 이 질문에 선뜻 긍정의 답변을 내놓기 어렵다.

의원들이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동안 기존의 미디어에서 이를 보도하는 모습은 기본을 잃은 언론이 어떻게 신뢰를 잃는지, 그 과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듯했다. 국회의장의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에 반대하며 야당 의원들이 시작한 필리버스터였지만, 미디어들은 “국회 마비” 프레임으로 일관하며 야당에 분노한 대통령이 몇 번 책상을 내리쳤는지, 누가 기저귀를 차고 필리버스터에 나섰는지 등에만 관심을 보였다.

▲ 어떤 이는 이런 모습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가 합쳐진”(2월 29일 <경향신문> 30면) 결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21세기 민주주의를 목도할 수 있는 순간, 정작 민주주의의 토대라고 불리는 언론은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오마이뉴스> 제공

정부와 여당이 반드시 통과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테러방지법이 무엇인지, 그동안 테러방지법과 관련해 국회가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쳐 왔는지, 국민 인권과 관련해 야당과 시민사회에서 염려하는 지점은 무엇인지, 그렇다면 어떤 대안을 논의할 수 있는지 등 언론이라면 마땅히 전하고 토론해야 할 내용들은 이들 언론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대형 미디어들이 전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민들이 모를까.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났다. 통제당한 미디어를 뚫고 ‘아랍의 봄’을 만든 새로운 소통 수단들은 한국의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힘을 발휘했다. 필리버스터를 중계하는 대안언론의 동영상 서비스는 ‘마국텔’(마이국회텔레비전)로 불리며 인기를 끌었다. 또 국회의원들을 소통의 수단으로 ‘직접’ 사용하려는 시민들은 그동안 세금을 내면서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정치권 주변에서나 익숙했던 국회방송의 존재를 적극 활용했다.

어떤 이는 이런 모습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가 합쳐진”(2월 29일 <경향신문> 30면) 결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21세기 민주주의를 목도할 수 있는 순간, 정작 민주주의의 토대라고 불리는 언론은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

흔히 민주주의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표현 자유의 중심에 언론이 있다. 헌법과 모든 언론 관련법에서 권력으로부터 독립과 보도․제작의 자유를 앞장에 적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확인한 언론의 현실은 이러한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고 있는 모습이었고, 시민들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며 기존의 미디어들을 조롱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 국회의장의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에 반대하며 야당 의원들이 시작한 필리버스터였지만, 미디어들은 “국회 마비” 프레임으로 일관하며 야당에 분노한 대통령이 몇 번 책상을 내리쳤는지, 누가 기저귀를 차고 필리버스터에 나섰는지 등에만 관심을 보였다.

물론 그래도 기존 미디어들은 아직 힘이 있다. 기존의 미디어들이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갈 길 바쁜 국회의 발목잡기로 설정하고 무시하거나 조롱하는데 수긍하는 여론이 있고, 이런 모습에 마음이 조급해진 야당 지도부는 헛발의 출구전략으로 필리버스터를 응원하던 여론마저 싸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힘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기존의 미디어를 대신할 새로운 미디어들과 결합한 시민의 힘을 우리는 이미 세계 곳곳에서 보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지금 기존의 미디어들이 처한 정치 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기존의 미디어에서 일하는 많은 언론인들은 내보내고 있는 뉴스들에 스스로 문제를 느끼고 있으며, 그렇기에 비판과 함께 응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기존의 미디어에서 일하는 많은 언론인들이 이런 보도와 방송을 하고 싶어 언론인의 길을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본심이 그러하지 않으니 이해해 달라고 대중을 설득할 순 없다. 중요한 건 이런 호소와 자괴감으로 지금 기존의 미디어들이 처한 환경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 스스로 변화를 말하지 못한다면, 기본을 지키려는 의지를 가로막는 벽에 주저앉는다면 건강한 민주주의의 공론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언론의 시대는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김세옥 <PD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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