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기간 동안 이곳저곳에서 돈을 융통했다. 복직 후 노조의 신분보장기금 환입이 1순위라고 생각했다.”

정인철 서울지부 동부지역지회장이 인터뷰 중 노조 신분보장기금을 복직하자마자 환입한 사실을 들추자 겸연쩍은 듯 웃으며 답했다. 정 지회장은 2년 동안의 복직투쟁을 마치고 부당해고 재판에 승소해 지난 5월 회사에 복귀했다. 6월7일 2년 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받았다. 정 지회장의 하얗게 센 머리가 해고기간의 마음고생을 대신 얘기하는 듯했다.

정인철 지회장은 아세아이엔티라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해고당했다. 아세아이엔티는 정전에 대비한 비상전원 등 전기관련 기기를 만들고 유지보수 하는 회사다. 정인철 지회장은 이 회사가 판매한 무정전 전원장치의 유지보수 업무를 맡고 있다. 무정전 전원장치는 이름 그대로 전기가 나갔을 때 지속적으로 전원을 공급하기 위한 장치다.

정 지회장은 “생명유지장치를 계속 운영해야 하는 병원이나 데이터를 보호해야하는 금융기관의 전산실 같이 한시라도 전기가 끊기면 안 되는 곳에서 무정전 전원장치를 쓰고 있다”며 “쉽게 얘기하면 충전 배터리로 전원을 공급해 정전상황을 해결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장치다”라고 소개했다.

 

첫 직장이 마지막 직장 될 줄 알았다

정인철 지회장은 아세아이엔티에 2006년 입사했다. 병역특례로 들어간 회사에 눌러 앉았다. 병역특례자에 대한 부조리와 회사의 불합리한 관행을 겪고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입사 2년만이었다. “병역특례라는 신분으로 인해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았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때가 있었다. 병특을 하는 사람들은 불이익을 받아도 회사에 얘기하기 정말 힘들다.”

함께 병역특례를 하다 회사에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한 동료가 임금삭감을 당했다. 회사에 밉보인 동료들이 병역특례가 끝난 후 회사에 눌러앉지 못하고 쫓겨나듯 떠나는 걸 보고 정인철 지회장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정 지회장은 현재 아세아이엔티에 남은 유일한 노조원이다. 노조에 가입했던 동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다 떠나고 남은 22명의 직원 중 유일한 노조 조합원으로 남은 셈이다. 유일한 노조 조합원은 회사의 눈엣가시였다.

▲ 정인철 지회장은 “투쟁을 하면서 노조 신분보장기금을 받아보니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깨달았다. 노조 신분보장기금은 금속노동자의 무정전 전원장치다”라며 “신분보장기금 혜택을 받은 동지들이 잘 싸우고 승리해서 다시 충전해야한다. 그래야 앞으로 더 많은 동지들이 더 길게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당부했다. 김경훈

정인철 지회장은 “회사는 2014년 교섭 중에 근무성적이 낮고 근태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해고장을 날렸다. 첫 직장이 마지막 직장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일 했는데 해고장을 받아보니 황당했다”고 돌아봤다.

정 지회장은 회사의 해고를 명백한 부당해고라고 규정하고 투쟁을 시작했다.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두 아이와 가족의 생계가 걸려있기 때문에 지루한 법정공방을 동반한 복직투쟁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노동재판은 8심제?

사법부는 잇따라 정인철 지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지노위, 중노위, 행정법원 모두 회사의 해고가 부당해고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회사의 해고가 노조에 대한 지배개입을 목적으로 불이익을 준 부당노동행위라고 명시했다.

승소가 이어졌지만 바로 경제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었다. 정 지회장은 회사의 방해로 지노위 판결 전까지 실업급여 조차 받지 못했다. 실업급여가 나와도 기나긴 법률공방을 버티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돈과 힘이 있는 회사와 돈 없는 해고 노동자가 법률공방을 벌이면 노동자의 고통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정 지회장은 지방노동위원회에 나가 해고의 고통과 생계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노동재판은 5심을 넘어 8심이라는 얘기가 있다. 지노위, 중노위, 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까지 가야 결론이 나온다. 거기에 복직판결이 나와도 회사가 밀린 임금을 주지 않는다면 민사소송으로 다시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한다.”

회사가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상황에서 가족의 생계는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다. 회사가 부당해고를 한 게 명백하지만 기약 없는 재판일정 때문에 투쟁의지를 접고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정 지회장은 같은 시기 부당해고와 불법파견으로 법적 투쟁을 벌이던 KTX여승무원들을 보며 부당해고 당한 노동자에 대한 경제적 보호가 절실하다고 느꼈다. KTX 승무원들은 회사와 7년 동안 법정공방을 벌였다. 게다가 해고기간 받은 임금도 다시 내놓으라는 대법원의 판결로 한 노동자가 스스로 생명을 끊기도 했다.

 

노조 기금은 투쟁의 디딤돌

정인철 지회장은 “투쟁을 하면서 노조 신분보장기금을 받아보니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깨달았다. 노조 신분보장기금은 금속노동자의 무정전 전원장치다”라며 “신분보장기금 혜택을 받은 동지들이 잘 싸우고 승리해서 다시 충전해야한다. 그래야 앞으로 더 많은 동지들이 더 길게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당부했다.

노조의 신분보장기금은 해고자 지원 관련 법 제도가 부족한 상황에서 조합원들이 서로 연대하기 위한 일종의 부조다. 자본과 정권의 거센 탄압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에게 보탬이 되자고 만든 노조의 제도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앞으로 계속 보호하기 위해 기금의 안정 운용이 중요하다.

정인철 지회장은 “싸우고 싶은 의지가 있어도, 돈이 없어서 못 싸우는 게 노동자의 현실이다. 법정공방이 길어질수록 생계위협의 파도는 더 높아진다”며 “부당해고 재판의 최종심이 나올 때까지 고용계약이 지속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등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 제도가 꼭 필요하다”고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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