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노조(위원장 김상구)가 재벌을 정조준 했다. 노조는 지난 3월3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중앙교섭과 더불어 현대기아차그룹사 공동교섭을 추진하는 이른바 ‘투 트랙’ 교섭전략을 올해 투쟁방침으로 확정했다.

참가 대의원들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올해 투쟁방침에 재벌개혁을 핵심으로 하는 대정부 요구안이 포함돼 있다. 현대기아차그룹사 지부, 지회 대표자들 역시 지난 3월10일 대표자 회의에 전원 참석해 재벌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한 요구안을 확정했다.

노조가 이렇게 역량을 기울여 재벌개혁을 주요 투쟁 의제로 삼은 이유는 소득불평등과 비정규직 확산 등 경제-사회 문제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절박성 때문이다.

 

‘눈 가리고 아웅’, 대기업 노동자 임금이 문제라는 정부

정부는 지난 3월10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노동조건 격차를 해소하겠다며 ‘상생고용촉진대책’을 발표했다.

발표 자료에서 정부는 대기업 정규직에 비해 중소기업 정규직 임금은 52.3%,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34.6%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한-일 간 업종별 대표기업 임금비교에서도 국민총소득(GNI) 대비 임금은 한국 자동차 회사가 3.4배로 일본 도요타의 1.79배보다 높았고 한국 철강 회사는 3.05배로 일본 신일철주금의 1.28배보다 월등히 높다는 자료를 표로 정리해 발표했다.

공시자료로 계산한 값을 단순 비교한 방법과 의도를 따져볼 필요가 있지만 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문제의 핵심과 원인을 완전히 외면하고 민간 노사관계, 특히 금속노조와 특정 사업장을 겨냥한 노동개악 양대 지침 관철을 위한 여론전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비정규직 사용과 원하청 사이 불공정 거래 문제, 이에 따른 하청기업 저임금 문제는 수박 겉핥기식 대책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조건 격차를 해소하겠다며 대책을 내놨지만 심각한 중소사업장 저임금과 불공정거래 문제는 하나마나한 대책으로 방치한 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일부 사업장의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문제 삼았다.

우리나라 노동자 대다수가 시급제 저임금을 받고 있고 이 때문에 장시간 노동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전체 노동자 절반에 육박하는 비정규직 비중은 저임금과 고용불안 문제를 크게 만들고 있다. 경기부양을 원하는 역대 정부가 주택가격 하락을 막고 있어 노동자들은 전세자금 마련도 벅차다. 결국 주택자금을 대출받더라도 저임금으로 원금상환이 어려워 가계부채 총액은 날마다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 평균임금 비율 추이.

사회진출을 앞둔 청년층은 더욱 우울하다. 이들을 두고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며 ‘3포세대’로 부르다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5포세대’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얼마 전부터 꿈과 희망마저 포기해 더 이상 포기할 것조차 없다는 ‘N포세대’라는 명칭까지 등장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 재생산 구조가 위협받고 있다. 이런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마저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경제 활성화를 부르짖어도 소비가 늘 턱이 없다.

이 같은 온갖 경제-사회 문제 원인이 보수 언론에서 흔히 들먹이는 ‘귀족노조’ 조합원 임금에 있다면 정권과 자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들의 임금을 깎거나 동결시켜 버리면 될 일이겠지만 이 같은 하향평준화가 결코 문제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

 

국가 경제력은 재벌에게, 소득불평등은 노동자에게

한국은행이 2013년 발표한 ‘기업경영분석’을 보면 제조업이 우리나라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49.4%이지만 순이익 비중이 86.9%로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제조업 중에서 300인 이상 대기업이 우리나라 모든 기업에서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35.9%이고 순이익은 67.4%에 달한다. 제조업 대기업이 대부분의 매출과 순이익을 가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기업 중에서도 초거대 기업을 살펴보면 결국 문제는 재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내 100대 재벌기업은 전체 노동자 고용의 4%만 책임지지만 매출은 전체 기업 매출의 29%를 차지하고 순이익은 자그마치 60%를 가져간다. 이렇게 매출과 순이익을 올리면서 높은 지불능력을 쌓은 재벌이지만 ‘좋은 일자리 만들기’에 모범을 보이지 않고 있다.

2015년 고용노동부 ‘고용형태 공시제 현황’ 결과에 따르면 대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459만 명 중 비정규직은 182만 명(39.5%)이다. 10대 재벌기업 노동자 130만 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49만 명(37.7%)이다.

결국 이 같은 추세로 인해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소득불평등이다. 소득불평등 문제가 어제 오늘 발생한 일은 아니지만 그나마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경제-사회 문제를 야기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은 아니었다. 문제는 1997년 IMF 사태 이후 발생하기 시작했다.

1980년 고용노동부 통계에 의하면 전체 임금노동자 53.9%는 중소기업에 다니며 대기업 노동자 평균임금의 96.7%를 받았다. 그러나 상황은 최근 완전히 역전됐다. 2014년 현재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임금노동자는 80.9%로 대폭 늘었지만 임금은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수치와 비슷한 대기업 노동자 평균임금의 62.3%에 불과하다.

▲ 경제성장률과 가계소득-기업소득-정부소득 실질 증가율.

매출과 순이익이 재벌과 대기업으로 집중되는 상황에서 제조업 중소기업은 이른바 ‘임금 빼먹는 장사’를 벌이는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은 노조 조직률도, 원청에 대한 발언력도 형편없는 국내 중소기업이 이익 대부분을 재벌과 대기업에 넘기는 대신 노동자 ‘임금 빼먹기’인 저임금 장시간 노동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벌어졌다고 진단할 수 있다. 반면에 정부는 엉뚱하게 대기업 임금과 노조 교섭력을 문제 삼아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를 외치고 있다.

 

늘어가는 기업 저축, 폭증하는 가계부채

재벌이 중소기업과 대다수 노동자를 앙상하게 만들며 거둔 사회적 부는 어디로 갔을까. 어차피 재벌이 전체 노동자 고용의 극히 일부만 책임지는 이상 임금으로 돌리진 못한다. 그렇다고 가계로 돌아간 것도 아니다.

국가경제의 세 주체는 정부, 기업, 가계다. 한 해 동안 각 경제 주체가 생산활동에 참여해 벌어들인 소득의 합계인 국민총소득(GNI)을 살펴보면 부문별 소득 추이를 알 수 있다.

1990년 정부, 기업, 가계 소득이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13%, 17%, 70%다. 이 비율은 2014년에 각각 13%, 25%, 62%로 변했다. 정부소득 비율은 13%로 일정했다. 가계소득 8%가 준만큼 정확히 기업소득 8%가 늘었다. 가계소득 대부분이 임금소득임을 감안하면 지불능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이 80%가 넘는 저임금 고용을 책임지는 상황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결국 가계는 부채가 늘고 기업은 저축이 증가했다.

한국은행 국민계정 통계를 보면 1990년 가계순저축률은 21.7%, 기업저축률은 13.8%였지만 2014년 현재 가계순저축률은 6.1%, 기업저축률은 20.8%다. 더구나 이 같은 추세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기업을 거쳐 가계나 정부로 빠져 나갈 사회적 부가 기업에 계속 쌓이고 있는 셈이다.

반면 가계부채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2013년 초 <미디어오늘>이 보도한 ‘선대인경제연구소 2013년 경제 전망’에 따르면 1990년 74.4%였던 가계부채비율은 2011년 163.7%까지 상승했다. <한겨레신문> 역시 지난해 9월30일자 보도에서 2015년 6월말 가계부채비율이 166.9%라고 밝혔다.

이 같은 수치는 2008년 경제위기를 초래했던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당시 131%였던 미국 가계부채비율보다 높은 수치다. 대출규제 완화와 저금리로 가계 빚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가계소득이 늘지 않으니 당연히 빚이 늘고 있다.

▲ 경제주체별 저축률 추이 - 한국은행 국민계정 통계표.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재벌 사내유보금은 늘어나고 있는 기업저축률이 원인한다. 기업은 수익을 내서 노동자 임금, 주주 배당, 부품 대금 등을 지불하고 설비와 연구에 투자한다. 수익을 모아 미래 경제위기와 대규모 투자에 대비하기도 한다.

재벌 사내유보금은 천문학적인 규모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규모가 증가하는 데에 보다 큰 문제가 있다. 재벌이 사내유보금을 늘려가는 동안 중소기업과 노동자는 소득불평등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가계부채는 멈추지 않고 늘고 있다.

 

소득불평등과 일자리 문제 해결은 재벌개혁에서 출발

노조는 재벌로 인한 문제 해결을 위해 올해 대정부 요구안을 ▲대기업의 민주적 투명경영을 위한 소유와 경영 분리 ▲사내유보금을 통한 질 좋은 일자리창출 강화 ▲재벌의 원하청 초과이익공유제 도입 ▲재벌 법인세 확대를 통한 사회안전망 확대 등으로 결정하고 투쟁과 선전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원하청 초과이익공유제는 매년 납품단가를 인하해 하청업체 수익성에 악영향을 끼치는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제시한 방안이다.

원하청 불공정거래 개선을 위한 방안으로 성과공유제(Benefit sharing), 이익공유제(Profit sharing) 등이 있다. 성과공유제가 하청업체 원가절감 이익을 대기업이 공유하는 방안이라면 이익공유제는 대기업의 이익을 하청업체가 공유하는 제도다. 과거 이명박 정부 때 정운찬 총리가 중심이 돼 성과공유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실효성이 크지 않아 좌초됐다.

초과이익공유제는 원청과 하청 기업이 사전에 목표 이익을 정하고 이를 초과한 이익을 하청업체와 함께 나누는 방안이다. 배분 방식도 원청과 하청이 사전에 정한다.

노조가 제안한 방식은 원청업체가 이렇게 달성한 초과 이익 가운데 반은 원청이 차지하고 나머지 반을 하청기업과 기금으로 배분하는 방식이다. 원청기업은 배분 이익 가운데 80%를 하청기업으로 보내고 20%는 손실대비 적립금인 이익공유기금으로 적립한다. 하청기업은 배분받은 이익 가운데 50% 이상을 임금 인상과 후생복지에 사용해야 한다.

노조는 아울러 법인세 확대를 통한 사회안전망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이래로 이어진 법인세 공제-감면은 일종의 재벌 특혜다. 기업에 대한 법인세 공제-감면액은 2000년 4조3000억원에서 2013년 8조2000억원까지 늘었고, 공제-감면 항목도 수십 가지에 이른다. 이중 재벌의 법인세 공제비율은 무려 전체의 76.9%에 달한다. 전체 감면혜택의 59.4%가 10대 재벌에 돌아가고 상위 1% 기업 비중은 높아지고 있다.

새누리당은 이에 머물지 않고 가업상속공제 확대 법안을 제출했다. 재벌 상속에 대해 규제를 완화하고 세금감면 혜택을 더 많이 주자는 입장이다. 노조는 대정부 요구안을 통해 노동시장 양극화와 일자리 문제 해결은 재벌개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재벌감세 철회, 법인세 정상화 ▲초과이윤, 사내유보금 과세 ▲재벌총수 일가 불법-편법이익환수-부자증세 등 ‘재벌세 3대 입법’을 제안하고 있다.

노조는 이 같은 재벌개혁 의제를 올해 4.13총선과 내년 대선 정세에서 지속적으로 사회 쟁점화 할 계획이다.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