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거센 파고에 이어 7월 말부터 전국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 투쟁은 거제도 옥포 대우조선에도 휘몰아쳤다. 월 30만원에 월 560-580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을 감내해왔던 노동자들도 마침내 그동안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렸다. 이석규 열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대우조선은 1985년 이후 과잉 중복투자와 세계 조선 산업의 퇴조 등으로 어려움을 겪자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감원, 해고, 징계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1985년에 3만여 명이었던 노동자 수는 1987년에는 1만6천여 명으로 줄었고, 임금은 사실상 동결됐다.

▲ 이석규 열사.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홈페이지 제공.

1987년 1월과 2월, 선전물이 두 차례 현장과 기숙사에 뿌려졌다. 노조결성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4월부터 4번에 걸쳐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지만, 회사의 폭력적인 방해로 모두 실패했다. 8월 8일, 이상용 등 30여 명이 '민주노조 결성', ‘임금임상’을 외치며 파업을 선동했고, 지게차와 중장비 기사까지 합세하여 삽시간에 대오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지게차와 트레일러를 앞세우고 종합운동장으로 집결하여 결의를 다진 뒤 옥포 시가지와 충무의 신아조선까지 진출하여 차량시위를 벌였다. 다음날인 8월 9일 대우조선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8월 11일 노조위원장이 회사 측에 회유당하자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2차로 새로운 노조지도부를 세운 뒤 3천여 명이 파업농성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회사는 교섭을 거부했다. 8월 14일부터 거리로 진출한 노동자들은 연일 가두시위와 차량시위를 전개했다. 8월 20일에는 5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연좌농성에 돌입한 가운데 6차례에 걸친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은 결렬됐고 회사 측은 무기한 휴업을 통보해왔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1천 5백여 명의 전투경찰은 장승포에서 옥포구간 도로를 차단한 채 최루탄을 쏘며 집회가 끝난 뒤 평화적으로 행진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최루탄을 난사했다.

8월 22일, 김우중 회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옥포아파트 사거리에서 동료, 가족들과 평화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지 않기 위해, 스크럼을 짜고 앉은걸음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평화시위를 보장하겠다던 경찰은 갑자기 직격 최루탄을 난사했고 백골단은 흩어지는 시위대를 골목 구석까지 쫓아가서 짓밟고 옷을 발가벗기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경찰이 아이들과 임산부까지 나선 평화시위를 무자비하게 짓밟던 와중에 스물한 살의 대조립부 외업반 이석규 열사가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운명했다.

▲ 이석규 열사 장례식. 경향신문 제공

이석규 열사가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노동자들은 “돈도 필요 없다, 이석규를 살려내라!”며 대우병원 영안실로 모여들었다. 동료들은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 문을 용접으로 봉하고, 24시간 삼엄한 경계를 펴며 시신을 사수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변호사 노무현·이상수 등 각계 인사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장례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유족에게 장례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위임받은 장례준비위원회는 노조 집행부와의 연석회의에서 장례를 ‘전국민주노동자장’으로 하고, 장지는 망월동 묘역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8월 23일 아침 8시에 실시된 시체부검에서 이석규 열사는 오른쪽 가슴과 폐에 박힌 4개의 최루탄 파편으로 인한 산소부족 때문에 사망한 사실이 밝혀졌다.

8월 28일, 노동자, 지역주민 등 2만여 명의 애도 속에 대우조선 운동장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오후 3시경 총 28대의 버스에 나눠 탄 1천 5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옥포호텔 앞 도로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영구차를 앞세우고 망월동 묘지로 향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차량 행렬이 고성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시신을 탈취했다. 주변 야산에 잠복하고 있던 2천 5백여 명의 전경과 백골단이 몰려나와 장례집행위원 등 재야인사들의 차와 동문인 광주직업훈련원 출신들이 타고 있던 버스 창문을 박살내고 이들을 집단구타하며 강제 연행했다. 연행자 중 이상수, 노무현, 박용수는 구속되었다. 이어 경찰은 나머지 버스에 타고 있던 노동자들을 강제 하차시키고 유족 3명만을 태운 채 시신을 남원으로 이동, 밤 9시경 남원 선산에 시신을 매장했다.

이날 오후 6시 전국적으로 '고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추모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5만여 명 경찰의 원천봉쇄로 성사되지 못하고 전국에서 밤늦게까지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이날 전국적으로 개최된 추모제와 관련하여 933명을 연행했고, 이 가운데 64명을 구속했으며,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등 10여 명을 수배했다. 또 대우조선에서는 해고된 3명 외에 추가로 7명에게 몰래 잠입한 형사계장을 구타했다는 혐의로 살인미수죄를 적용, 구속했다. 이 사건은 민주노조의 투쟁에 대한 경찰의 폭력진압, 그 속에서 직격최루탄으로 인한 노동자 사망과 시신탈취에 이르기까지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폭력과 시신탈취는 단지 이석규 열사 한 명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들불처럼 번지는 789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노조 건설 운동 전체에 대한 폭력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무자비한 폭력도 민주노조를 향한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석규 열사가 사망한 그해, 10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에 참가했고, 1,000개가 넘는 사업장에서 새로운 민주노조 깃발이 올랐다. 민주노조를 위해 싸우는 모든 노동자의 곁에 이석규 열사의 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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