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조카가 스무 살이 됐습니다. 대학입학을 확정하고 고교 시절 마지막 겨울방학에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아무 기술도 없는 조카는 편의점에서 일했습니다. 첫 월급으로 부모님은 물론 조부모에게까지 용돈을 드렸다는 말에 흐뭇했습니다.

대학생으로 맞은 첫 여름방학에도 역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 소식을 먼저 전해주신 엄마는 하루에 5만 원을 번다면서 자랑했습니다.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딱 떨어지는 5만 원이 나올 리 없는데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조카에게 물었더니 하루 아홉 시간 근무하고 5만 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조카를 붙잡고 계산을 했습니다. (8시간 * 최저임금 5,580원) + (초과근무 1시간 * 최저임금 5,580원 * 1.5) = 53,010원이라고 계산을 해줬습니다. 3,010원을 편의점 사장이 떼먹은 것이니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껏 생색을 냈습니다.

“어렸을 적에 왜 고모는 우리에게 용돈을 주지 않느냐고 했지? 그때 ‘고모는 돈을 못 벌어서 용돈을 줄 수 없다. 하지만 조카들이 커서 좀 더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사실은 더 큰 용돈을 주고 있는 거’라고 했던 말 기억나니? 네가 아르바이트하면서 알량한 최저임금이라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고모 덕분인 줄 알아라. 사장이 딴소리하면 고모에게 연락해. 알바연대 소개해줄 테니.”

생색내는 저를 나무라지 않고 조카가 친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편의점에서 일하는 친구의 얘기였습니다. 친구가 일하는 편의점 사장은 최저임금을 요구하는 조카 친구에게 “최저임금 주겠다. 대신 너는 근무시간에 전화해서도 안되고, SNS 같은 것을 해서는 안된다. 휴대전화로 게임을 해서도 안된다. 네 시간은 내 것이다.”

그 이야기에 분개하며 제가 또 일장연설을 했습니다. “그건 지나친 처사다.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개인 일을 본다면 문제지만 편의점에 손님도 없고 정리할 물건도 없을 때 잠시 놀 수도 있는 거지. 마냥 넋 놓고 있으라는 것 아니냐? 그게 과연 업무 효율을 높이는 걸까? 고작 최저임금 주면서 한가한 시간까지 저당 잡겠다는 것이냐. 1분 1초도 그 꼴을 못 보겠다면 아르바이트비를 더 줘야지.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최저임금이다. 적정임금도 아니고 최고임금도 아니다.”

이어지는 조카의 얘기는 더 기가 막혔습니다. 첫 3개월간은 수습 기간이라면서 최저임금의 8%를 떼 갔다고 합니다. 조카 친구가 일했던 편의점 사장이 최저임금을 지급하면서 냈다던 생색에 비하면 제가 조카에게 낸 생색은 생색 수준에도 한참 못 미쳤습니다.

▲ 몇몇 사람이 유독 나빠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사회 분위기가 오랜 세월 용인해온,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는 노동의 권리에 대한 부정과 노동의 대가를 치르는 것에 대한 야박함을 넘어선 뻔뻔한 부조리함. 6월27일 서울역 광장에서 최저임금 1만원쟁취, 노동시장 구조개악 저지 전국노동자대회를 마친 홈플러스노조 조합원들이 최저임금 1만원을 촉구하는 구호를 적은 카트를 밀며 행진하고 있다. 사진=신동준

조카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이야기는 정비사인 막내동생이 임금 차별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사회 노동자에 대한 인식, 한국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논쟁 아닌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일한 만큼 받을 수 있는 사회,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권리 등을 이야기하면서 말이죠.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숙부가 대화에 동참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설전이 오가다 마지막에 한 말씀은 충격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기 권리만 이야기한다. 그럼 왜 회사가 부도나면 그 책임은 안지냐? 만날 월급 올려달라는 말만 하면서……. 좋은 것만 갖고 어려운 것은 피하는 건 이기적이지 않냐.”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말했습니다. “작은아버지, 노동자들에게 경영자와 같은 무한 책임을 요구하려면 경영자와 노동자가 평소에 대등한 대접을 받았어야죠”로 시작하는 일장연설을 하려는 찰라 이제 제사 지낼 시간이라는 엄마의 한마디로 대화는 중단됐습니다.

대화를 계속 했다면 서로 이해하기보다는 언성이 높아지며 파국으로 치달았을 테니 그쯤에서 끝난 게 다행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쩌면 당장 그 자리에서는 충분히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다르게 생각할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남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후자의 상황은 어려웠을 겁니다. 서너 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회사가 여러 고비를 넘기고 중소기업 규모로 성장할 때까지 고생하신 숙부에게 회사는 ‘우리 회사’가 아니라 ‘나의 회사’니까요. 함께 성장을 일군 직원들에게 갖는 숙부의 고마움은 별개로 하고 말입니다.

가족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무 살이 된 조카가 노동하고 노동의 대가를 받기 위해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흐뭇하면서도 불편한 사실 하나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는 주변 사람들 중에서 최저임금 이상을 받는 것을 못 봤다는 사실. 최저임금은 그야말로 이 금액보다 조금 주면 절대로 안된다는 최하한선임에도 그마저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주지 않으려는 사람들. 고작 최저임금 주면서 온갖 생색을 내며 큰소리치는 사람들.

몇몇 사람이 유독 나빠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사회 분위기가 오랜 세월 용인해온,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는 노동의 권리에 대한 부정과 노동의 대가를 치르는 것에 대한 야박함을 넘어선 뻔뻔한 부조리함.

4년 후 조카의 미래는 어떨까 그려봤습니다. 지금 조카는 뿌듯한 마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4년 후에 그의 삶은 어떨지.

‘내 던져졌지. 취직 하나 못해서 빈둥대다가 시작한 일이 아르바이트. 시급이 삼천원. 시작은 했지만 오랜 못할 일. 날씬한 다리 매끈하게 차려입은 커리어 우먼 꿈꿔 왔지만. 아르바이트 시급이 삼천 원. 시작은 했지만 오랜 못할 일. 오 엄마 보기 참 딱했지. 울 아빠 보기도 민망했지. 멋지게 살고 싶었는데 밀려서 한 일이 시급이 삼천 원 시급이 삼천 원.’ - 연영석 <아르바이트> 중에서

연영석의 노래 <아르바이트> 속 화자와 같은 입장이 되지는 않을지. 다만 시급이 몇 푼 올라있을 뿐. 혹은 밴드 ‘저녁‘의 <시간팔이 소녀> 속 주인공처럼 ‘시간을 팔아요. 시간당 겨우 5,000원에. 어쩜 이러다 취직은 할랑가 모르겠네. 엄마 너무해요. 이제야 겨우 졸업인데. 씩씩 내뱉은 한숨이 공해처럼 떠도네. 이제야 어른 흉내 내는 내게 갑자기 덜컥 영화 속 공주님처럼 그런 기대 말아요. 내게 잔소리, 뻔한 잔소리. 째려보지 않아도 내게 잔소리, 뻔한 잔소리. 용돈 끊지 않아도 알아요. 언젠가 후련히 갚을 등록금에 아직은 삐걱삐걱 휘둘리기만 해. 편히 잘 수 없어요’라고 읊조리고 있을지도.

마음이야 어떤 사람들 말처럼 ‘질 좋은 청년 일자리’가 만들어져 당당하게 일하고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지만, 유체이탈 허언을 중얼거리고 있는 정부를 보면 그럴리는 없을 터. 현실적으로 3포 세대 혹은 7포 세대의 일원이 될 거라는 추측이 현실적일 입니다. 미안하다. 조카. 미안하다 젊은이들. 기성세대로서 꼰대처럼 당부할 수밖에.

조카야. 미안하지만 너도 자신을 위해 싸우길 바란다. 3인조 블루스록밴드 예술빙자사기단처럼 씩씩하게 말이다.

‘만 원은 줘야지 인간적으로 내가 무슨 거진 줄 아냐. 한 시간을 일해도 든든하게 밥 한 끼 못 사 먹는 더러운 세상. 높으신 양반들이 지들끼리 정한다네. 이 돈 갖고 한 번 살아봐. 올릴 수 있는 거 다 알아 수작 부리지 마. 만원은 줘야지 인간적으로 내가 무슨 거진 줄 아냐. 만 원은 줘야지 상식적으로. 나도 사람답게 좀 살자.‘ - 예술빙자사기단 <최저임금블루스>

그리고 어른들에게 말해주렴.

‘사람답게 사는 건 모두 똑같은 거야. 그 누구의 인생도 최저인생은 없어. 찾아와 찾아와 행복하게 살 권리. 찾아와 찾아와 빼앗기지 말고 찾아와.‘ - 선언 <이 돈으로 살아봐>

네가 이렇게 외칠 때, 세상을 바꿔놓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너와 손잡고 같이 싸울테니까.

민정연 / <희망의 노래 꽃다지> 대표

*연재를 마칩니다. 무대, 거리, 현장에서 꽃다지와 함께 만납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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