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5월12일 현대차 정문 안에서 한 점의 불길이 타올랐다. 승용2공장 대의원이자 해고노동자였던 양봉수 열사였다.

양봉수 열사는 이날 공동소위원회 발대식 참석에 참석하기 위해 정문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경비대가 폭력적으로 출입을 틀어막자 양봉수 열사는 시너를 몸에 붓고 “내 몸에 손대지 마라”며 저항했다. 몸싸움이 벌어졌고 경비들은 열사 앞뒤로 달라붙었다. 라이터에 불이 붙고 순식간에 열사는 불길에 휩싸였다.

전신 75%의 3도 화상. 양봉수 열사는 31일의 투병 끝에 6월13일 우리 곁을 떠났다. 장례식은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다. 열사 유골을 실은 버스 조차 백골단이 가로채서 추격전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솥발산 묘역에 열사 묘소를 만들었다.

▲ 양봉수 열사.

당시 현대자동차지부 이영복 집행부는 실리추구, 노사화합을 표방했다. 지부가 직접 나서 생산량 문제점을 분석하고 노사합동세미나를 개최해 생산관리업무를 대행했다. 지부는 회사와 화합을 강조하면서 상급단체와 지역연대는 거부했다. 지부는 “외부와 연계한 연대파업은 안 한다”며 불참했다. 이에 대해 조합원들이 비판하면 “임단투 앞두고 유언비어 날조, 거짓선동을 벌인다. 응징하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활동가들이 대자보라도 내면 지부 간부들에 의해 뜯기거나 노동조합으로 불려가야 했다.

호기를 만난 회사는 노무관리를 강화하며 징계를 남발했다. 안전사고나 맨아워 합의 불이행으로 라인을 정지하면 중징계가 떨어졌다. 이에 저항하면 “회사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줬다, 사규위반과 업무방해에 해당한다, 신원보증인에게도 손해배상 청구하겠다”고 협박했다. 집행부는 현장투쟁에 대해 “지부와 아무런 사전협의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며 회사 편에 섰다. 결국 노동 강도는 강화됐고 산재는 창사 이래 최고 건수를 기록했다.

당시 대의원이었던 양봉수 열사는 회사가 맨아워 협상 중 약속을 파기하고 신차(마르샤)를 강제투입 한 데 항의하며 20분간 라인을 중단했다. 이 때문에 두 번째 해고를 당했다.

양봉수 열사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21일간 철야 텐트농성과 중식집회, 잔업거부 투쟁을 이어갔다. 농성이 끝나자 회사는 탄압을 더욱 노골화했다. 회사는 열사가 맨아워 협상장에 들어가자 해고자는 종업원이 아니라며 경비 20여 명을 동원해 집단폭행 하고 정문 밖으로 내던졌다. 회사는 3,100만원의 손해배상까지 청구했다. 지부는 “우리 회사에 해고자는 없다. 사규위반 면직자만 있을 뿐이다”라며 법과 단체협약이 정한 정당한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 치료중인 양봉수 조합원.

양봉수 열사는 5월12일 분신을 통해 부당함에 항거했다. 지부는 “양봉수씨의 죽음은 노동조합과 무관한 개인적 사유에 의한 사고”라며 회사와 동일한 입장을 밝혔다. 분노한 현대차 활동가들과 민주 소위원들의 결단으로 분신장소 주변에서 5백여 명이 항의농성을 시작했다. 민주 대·소위원 50여명이 구성한 대책협의를 시작으로 전직 노조위원장 대책협의, 현장 제조직 긴급대책회의를 거쳐 5월13일 새벽 2시40분 ‘양봉수 동지 분신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현장은 술렁거렸다. 2공장 조합원들은 “양봉수 대의원이 분신했는데 라인 돌려도 되냐”며 웅성거렸다. 대의원들은 대책위 지침이 나올 때까지 일단 일하자고 했고 라인은 그대로 돌아갔다.

소위원 등 현장 활동가들은 분신상황을 알리고 보고대회로 모이자는 내용을 종이에 써서 컨베이어에 흘려보냈다. 13일 새벽 4시 휴게시간에 보고대회가 열렸다. 분노로 가득한 집회는 휴게시간 20분을 넘겼고 대의원들은 회의한다고 빠져나갔다. 그 때 누군가가 나섰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일 합니까.” 작업 시작종이 울렸지만 조합원들은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라인은 끊겼다. 파업대오는 본관 앞으로 이동해 집회를 이어갔다. 다음 날 아침 8시 교대시간, 대오는 다시 현장으로 진입했고 출근길 소식을 접한 교대조는 파업대오에 합류했다. 자연스레 파업은 이어졌다. 2공장 파업대오는 1공장으로 달려갔고, 파업은 1공장으로, 이어 전 공장으로 확산됐다.

5월14일 조합원 50여 명이 텐트 철야 농성을 진행했다. 다음날은 1공장과 2공장 조합원이 전면파업을 벌이고 14시 3천 여 명이 합동 집회를 벌였다. 17시에는 비가 오는 와중에도 5천 여 명으로 늘어난 조합원들이 집회를 이어갔다. 16일 1, 2, 3, 4공장으로 파업이 확산됐다. 5천 여 명이 정문에 모여 집회를 진행하며 17일부터 전면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17일 전 공장 조합원이 전면 총파업에 돌입했다. 회사는 무기한 휴업을 공고했다.

5월20일 ‘울산만 작전’으로 14명이 구속되고 12명이 고소고발 당했다. 다섯 명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회사는 23일 휴업을 철회했다.

양봉수열사의 분신과 조합원들의 비공인 파업은 현대자동차지부를 변화시켰다. 조합원들은 집행부 지침에 따라 움직이던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결정해 공장을 세웠다. 현장 활동도 활발해졌다.

조합원들은 노사화합을 통한 실리추구를 표방하던 이영복 집행부를 ‘어용’이라 규정하고 민주활동 복원을 위해 새로운 현장조직건설 모색과 현장투쟁을 강화 했다. 이러한 각성은 현대자동차지부가 노사협조주의에 빠지지 않고 민주노조 깃발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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