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서비스 양산센터의 AS노동자이자 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 분회장이였던 염호석. 그는 유난히 정이 많고 다른 이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동지였다. 양산센터 악질 관리자가 노동자들을 못 살게 굴면 비조합원의 일이라도 자신의 일처럼 싸웠다. 따뜻한 가슴을 품은 그는 전국 각 분회의 어려움에 같이 아파했고 연대에 앞장섰다. 투쟁에 나설 때는 누구보다 결의에 찬 모습으로 조합원을 이끄는 간부였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삼성의 살인적 노조탄압으로 최종범 열사 투쟁과 총파업 투쟁, 해운대·아산·이천센터 위장폐업 철회 투쟁, 임단협 쟁취 투쟁까지 숨 돌릴 겨를 없이 험난한 길을 달려왔다. 그 과정에서 지난해 5월9일 지회는 ▲임단협 쟁취 ▲생활임금 쟁취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다. 그해 5월12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앞 상경투쟁을 전개했다.

▲ 염호석 조합원이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지회 제공

상경투쟁 당시 마무리 발언자로 나섰던 염호석 열사는 다음 상경투쟁을 기약하며 함께할 것을 주문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지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힘찬 모습으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본 열사의 마지막 모습이다.

지난해 5월, 지회 조합원들은 노조탄압으로 줄어든 일감과 파업투쟁 속에 반토막은 커녕 3분의 1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남모르게 한숨 쉬던 시기였다. 삼성이라는 큰 벽에 부딪혀 노동조합 인정과 임단협을 쟁취하기 위해 언제까지 파업투쟁을 이어가야할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염호석 열사는 2014년 5월17일, ‘빛을 잃지 않고 내일도 뜨는 해처럼 이 싸움 꼭 승리’할 것이라며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염호석 열사가 우리 곁을 떠난 이후 그의 시신을 지키는 것부터 투쟁이었다. 지회가 승리하는 그 날 정동진에 자신을 뿌려달라던 열사의 유지를 공권력은 처참히 짓밟았다. 열사의 부친과 모친이 노조에게 장례절차를 위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친은 일방적 입장을 바꿨다. 경찰은 사랑하는 동료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시신을 탈취하는 순간까지 삼성 관계자들은 유가족 곁에 계속해서 나타났다. 한 개인의 시신을 운반하는 과정에 경찰 기동대를 동원하고 최루액을 난사했다. 그곳에 상식은 없었다.

열사를 보낼 수 없었던 부산양산지역 지회 조합원들은 부산의 모든 장례식장과 화장터를 찾아갔다. 밤늦게까지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숨바꼭질을 진행했고 행림병원 장례식장에서 그의 빈소를 찾을 수 있었다.

조합원들이 열사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하기 위해 조문했던 빈소는 가짜빈소였다. 시신은 밀양화장터에서 기습적으로 화장했다. 조합원들은 열사의 모친과 함께 유골함이라도 되찾고자 분투했지만 경찰 기동대에 가로막혔다.

▲ 2014년 6월30일 염호석 열사 정동진 노제에서 열사와 친형제 같이 가까웠던 염태원 양산분회 대의원은 전날 가져온 정동진의 모래를 바다로 다시 뿌리며 오열했다. 조합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거나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담배를 태우며 슬픔을 달랬다. 사진=김형석

유골함을 양산 하늘공원에 안치한다고 했지만 이마저도 거짓으로 밝혀졌다. 열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형제처럼 누이처럼 지냈던 동료건만 가는 길조차 함께할 수 없음에 허망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삼성의 힘이 어떠한 것인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조합원들은 이때부터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염호석 열사의 유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2014년 뜨거웠던 여름, 그곳에는 1500개의 빛이 있었다. 길거리에서 잠을 자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모습이 서울 강남 한복판과 이질적이었지만, 웃으면서 투쟁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싸움을 만들어가는 조합원들은 찬란하게 빛났다.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도 정동진을 그리며 승리를 다짐했던 우리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마치 호접몽처럼, 우리는 가끔씩 돌아온 지금이 꿈결처럼 느껴진다.

염호석 열사의 뜻을 잇는 41일간의 노숙투쟁과 수많은 동지들의 연대가 마침내 우리를 승리로 이끌었다. 삼성의 76년 무노조 경영을 끝장내고 노동조합을 인정받으며 임단협을 체결했다. 열사가 떠난 지 45일 만에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열사 투쟁 이후에도 단협 위반, 노조탄압, 위장폐업까지 무수히 많은 투쟁이 있었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염호석 동지가 우리 안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열사는 우리에게 와서 빛이 됐고 심지가 됐다.

염호석 열사 1주기를 맞으며 조합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기억한다’이다. 염호석 열사가 떠난 그 날을, 우리의 싸움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내일도 떠오르는 태양처럼 굳건한 민주노조를 건설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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