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상류사회>(SBS)라는 드라마를 즐겨 본다.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특히 눈길이 가는 캐릭터가 있기 마련이다. 이 드라마에서 흥미롭게 보고 있는 캐릭터는 주인공 윤하(유이)의 큰 언니 예원(윤지혜)이다.

재벌가의 첫째 딸 예원은 욕망부터 재능까지 자신보다 나을 게 없어 보이는 동생인 경준(이상우)이 오직 남자라는 이유로 그룹의 후계자가 됐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인생은 모를 일.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위해 예원은 불만스러운 부모도 비즈니스 마인드로 깍듯하게 모신다.

재벌이나 권력 소재 한국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상이다. 그런데 예원의 캐릭터가 눈길을 끌었던 이유는 극 초반 그녀가 평소 눈여겨보던 비서에게 ‘자기 사람’의 가치를 말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예원은 그룹의 회장인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업상 문제부터 원하는 여자까지 생각하는 모든 걸 ‘알아서’ 실현해주는 ‘자기 사람’이 있었다며, 은근하게 자신이 차마 실행할 수 없는 나쁜 생각을 대신 실현할 가신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다고 비서를 회유하는 모습이었다.

예원은 비리 문제로 자신을 압박하는 동생 경준과 다투고 “내가 행동할 수 없는 나쁜 생각을 실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쟤 세상에서 아웃시켰으면 좋겠어”라고 분통을 터트린 후였다.

극 초반이었기 때문에 캐릭터 소개와 앞으로 전개할 복선을 깔아놓기 위함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사실 대사로 드러나는 직접적인 욕망은 유치해보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현실에서 이런 욕망이 실현된 듯 보이는 순간들은 생각보다 많고, 또 무섭다.

아직도 끝났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지난 6월 한 달 동안 한국 사회는 메르스 공포에 시달렸다. 메르스 사태 속 정부와 함께 제대로 신뢰가 깎인 곳이 있다. 바로 삼성서울병원이다. 급기야 6월 2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직접 대국민 사과에 나서면서 고개를 숙였고, 이렇게 약속했다. “책임을 통감한다. 환자분들은 저희가 끝까지 책임지겠다.”

약속은 지키지 않았고 SBS <8뉴스>는 7월 3일 네 번째 리포트에서 이 사실을 보도했다. 대국민 사과를 하는 이재용 부회장의 모습으로 시작한 이 리포트에서 신동욱 앵커는 “열흘 만에 이 약속은 번복됐다”며 “치료 중인 확진 환자 15명 가운데 12명을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로 했기 때문이다. 별도의 음압 병상이 없는데다 방호복까지 입은 의료진 감염이 잇따르자 결국 백기를 들고 만 셈”이라고 꼬집었다.

SBS는 이 리포트를 뉴스 방송 직후 수정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영상은 사라졌고 이 부회장의 약속 번복을 꼬집는 앵커 멘트 또한 삭제했다. 현재 SBS 뉴스 홈페이지와 포털에 올라와 있는 리포트는 “삼성 서울병원이 치료 중인 메르스 환자 10여 명을 다른 병원으로 옮겼거나 옮기기로 했다. 시설 부족에 의료진 감염이 잇따르자 결국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앵커 멘트를 수정해 재녹화한 영상이다.

기자들이 항의하고 나섰다. SBS기자협회는 보도국장에게 사태의 경위를 밝히라고 요구했고, 보도국장은 “외압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SBS는 앵커가 멘트로 이재용 부회장의 책임을 직접 묻는 식으로 상황을 요약해 과잉보도 했다고 판단했단다. 서울삼성병원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도와 무관하게 구성과 형식으로 인해 자칫 ‘SBS가 이재용 부회장을 직접 겨냥한 의도가 뭘까’라는 억측 또는 잘못된 메시지가 퍼질 가능성을 우려해 ‘상식적인 적정선’에 대한 판단을 근거로 내린 결정이라고 보도국장은 설명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 당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언론은 지키지 않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SBS는 이내 사실을 말하는 게 오해를 부를까 두려워 ‘알아서’ 시청자들에게 이미 전달한 내용을 슬쩍 고쳤다고 한다. 심지어 외압도 없었다고 강조한다.

이 모든 해명이 사실이라면, 조금 무섭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언론 스스로 보도의 한계선을 정하게 만든 삼성이라는 존재가, 삼성의 오너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일까 저어해 서둘러 사실의 보도를 고치고 ‘상식적인 적정선’을 말하는 언론의 현실이 말이다.

김세옥 / <PD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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