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5일, 하이디스 원정투쟁단 열 한 명이 대만 땅을 밟았다. 열 명의 원정단이 두 차례에 걸쳐 대만에서 강제추방 당하고, 마지막 남은 이상언 민주노총 경기본부장이 연행과 강제추방이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을 받고 스스로 귀국하기까지 우리들이 외친 요구는 하나였다. 배재형 열사의 죽음에 책임져야 할 사람, 정리해고와 공장폐쇄를 철회 할 사람, 영풍위그룹 회장을 만나겠다는 것.

5월26일 원정단은 영풍위그룹 본사를 찾아갔다. 경찰은 본사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건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은 셔터를 내려둔 상태였다. 본사에 들어가겠다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열사 영정이 이리저리 채이고 깨졌다. 원정단을 처음 대면한 영풍위그룹의 대응이었다.

▲ 6월9일 한국 하이디스 원정투쟁단과 대만 연대 동지들이 대만 이잉크 주주총회장 앞에서 대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타이페이=강정주

영풍위그룹 호쇼우추안 회장 집. 누구보다 먼저 집 문 앞으로 걸어간 사람은 상복을 입은 배재형 열사의 부인이었다. 단단히 닫힌 철문을 맨 손으로 세차게 두들기던 모습. 남편의 시신을 열흘 넘게 냉동고에 두고, 두 아이를 한국에 남겨둔 채 대만까지 와야 했던 부인의 절박함에도 여전히 영풍위그룹은 대답이 없었다.

대만 동지들의 도움으로 배재형 열사 분향소를 집 앞에 차렸다. 이때부터 보름 동안 노숙을 시작했다. 첫 날부터 쉽지 않았다. 차량 통행을 방해하니 천막은 절대 안 된다는 대만 경찰 때문에 하늘을 가릴 비닐 한 조각 없이 노숙을 시작했다. 때마침 폭우가 내렸고 우비 하나 입은 채 온몸으로 비를 다 맞아야 했다. 누구하나 피할 생각하지 않고 지친 몸을 맨 바닥에 눕히고 분향소를 지켰다.

▲ 5월26일 하이디스 원정단은 영풍위그룹 호쇼우추안 회장 집 앞에 배재형 열사 분향소를 차리고 노숙을 시작했다. 조합원들이 경찰의 방해로 천막도 설치하지 못한 채 비를 맞고 있다. 타이페이=강정주

보름의 원정 투쟁 기간 동안 대만 영풍위 자본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외면과 무시, 거짓말 뿐이었다. 대만 시민들에게 선전전을 하던 어느 날 우연히 영풍위그룹 계열사인 영풍은행을 지났다. 고작 세 명의 원정단이 선전물을 들고 지나가는 순간, 은행 경비들은 우리가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셔터를 내렸다. 은행 안에 업무를 처리하던 고객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우리를 막는 일이 가장 급했다.

영풍은행 사탕보다 못한 처지의 원정단 

대만 총통의 정책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호쇼우추안 회장, 이름만 대면 대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거대 자본인 영풍위그룹. 영풍위는 광고 등을 빌미로 대만 언론을 통제했다. 한국 하이디스 사장이 하는 거짓말을 그대로 대만 언론에 뿌렸다. 이잉크는 ‘우리는 지속적으로 한국 하이디스 노동자들과 만나고 있다’는 거짓말을 했다. 하이디스지회 교섭 대표들이 모두 대만에서 그들을 만나겠다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어떤 요청도 없었다.

▲ 하이디스 원정단이 대만 타이페이 지역노조 간부들과 간담회를 진행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만의 노조, 학생, 단체 동지들은 원정투쟁 기간 동안 하이디스 투쟁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타이페이=강정주

“영풍은행에 가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사탕에 영풍위그룹 마크가 있어요. 우리는 그 사탕보다도 못한거죠. 그냥 버린거지.” 여전히 영풍위그룹 마크가 찍힌 하이디스 출입증을 걸고 있는 조합원은 회사의 태도에 분노했다.

대만 정부도 다르지 않았다. 찌는 듯 한 더위와 수시로 내리는 폭우, 모기들의 습격이 견디기 힘들었지만 원정단을 더욱 괴롭힌 사람들은 대만 경찰이었다. 대만 송산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경찰은 계속 우리를 따라 다녔다. 24시간 채증 카메라를 든 경찰이 농성장과 농성 인원을 찍었다. 보름 농성 기간 동안 네 번이나 찾아와 경고장, 벌금 통지서, 출석 요구서를 주고 갔다.

6월9일 농성장에 들이닥친 경찰은 아무 설명 없이 한국 원정단을 연행했다. 단식자를 경찰 버스에 밀어 넣으며 폭행했다. 경찰서로 가지 않고 이민소로 원정단을 끌고가 밤샘 조사를 했다. 조사 몇 시간 만에 여덟 명의 원정단은 대만 달러 2천원의 벌금 통지서를 각각 받았다. 절차와 내용 모두 불법 연행이었지만 대만 경찰과 이민소는 원정단을 17시간 동안 불법 감금했다. 밥도 주지 않았다. 원정단의 항의 끝에 이민소에서 준 식사는 검은 먼지가 덮힌 하얀색 식기 위에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 하이디스 원정단과 대만 연대 동지들이 호쇼우추안 회장 집 앞 농성장에서 저녁 문화제를 진해하고 있다. 타이페이=강정주

대만 정부와 경찰, 이민소 직원들은 한국 원정단을 인권을 보장할 필요조차 없는 중범죄자로 취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대만 땅에서 쫓아내는데 급급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타이페이 한국대표부 영사와 부대표도 다르지 않았다. 결국 원정단은 영풍위와 이잉크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한국으로 쫓겨 돌아왔다. 죽은 동료의 영정을 들고, 내 일터를 지키겠다고 바다를 건넜던 원정단에게 대만은 참으로 잔인했다.

이 잔인한 땅에 귀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상언 본부장이 돌아오기까지 26일의 원정 투쟁을 함께한 대만의 동지들. 농성장은 한시도 외롭지 않았다. 처음 분향소를 설치한 날부터 대만 연대 동지들은 매일 이곳을 함께 지켰다. 밤새 한 숨도 자지 않고 분향소 향을 갈고, 원정단이 모기에 물릴까봐 모기향에 불 붙이는 일을 도맡았다.

잔인한 땅 대만에 사람이 있었네

며칠째 농성장을 지키는 대만 동지에게 집에 가서 쉬다가 오라고 말해도 자신의 집은 여기라면서 우리가 연행 당하던 순간까지 떠나지 않았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회의를 하면서도 자신의 일처럼 투쟁 계획을 고민하고 토론하던 동지들. 학생들은 아침이면 학교에 갔다가 다시 농성장으로 찾아왔다. 매일 밤 몇 십명의 대만 동지들과 한국 원정단은 얘기를 나눴다. 스마트폰 번역기로 띄엄띄엄 대화를 이어가고, 안 되는 영어를 총 동원하면서 얘기했다. 우리는 하나의 끈으로 묶이는 듯했다.

▲ 대만 동지들은 매일 분향소와 농성장을 같이 지켰다. 대만 연대 동지가 배재형 열사의 분향소에 분향을 하고 있다. 타이페이=강정주

경찰이 농성장을 침탈하러 오면 맨 앞에서 분향소를 지키다 연행 당했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 단체, 노조 회의에 원정단을 불러 하이디스 투쟁을 알리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원정단 여덟 명이 강제 연행된 6월9일 밤, 대만 동지들은 경찰서 앞에서 원정단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세 명이 연행당하고 경찰의 폭행으로 피를 흘리며 병원에 후송되기도 했다.

6월10일 원정단이 추방당하던 날 공항에서 대만 동지들은 우리와 함께했다. 공항이 떠나가라 “공장폐쇄 철회, 정리해고 철회”를 외쳤다. 이민소 직원들을 뚫고 원정단의 손을 하나씩 잡아주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던 대만 동지들의 얼굴은 평생 잊을 수 없다.

▲ 정규전 노조 경기지부장과 이상목 하이디스지회장의 단식 농성 100시간째, 농성장을 함께 지키던 원정단과 대만 연대 동지들이 투쟁을 결의하며 사진을 찍었다. 타이페이=강정주

하이디스 3차 원정단은 모두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대만에서 하이디스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대만의 변호사와 인권 활동가들은 한국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 추방과 입국 금지 조치의 부당함을 밝히기 위해 대응하고 있다. 대만 연대 동지들은 영풍위그룹 불매를 시작했다. 여전히 대만 중화통신노조 사무실에 배재형 열사의 분향소가 있다. 매일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리고 대만과 한국 음식을 번갈아 올려주고 있다.

하이디스 노동자들은 다시 대만에 간다. 대만 동지들과 함께하는 투쟁을 더 확산시킬 것이다. 한국에서 노숙 농성과 공장폐쇄, 정리해고 철회 투쟁도 멈추지 않는다. 하이디스 투쟁의 승전보는 곧 대만과 한국에서 울릴 것이다. “짜요. 투쟁.”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