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가족들의 염려와 큰 격려를 받으며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을 떠나 대만 땅에 온 지 벌써 이틀이 지났네요.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타향에 와보니 가족의 소중함을 한 번 더 뼈저리게 느낍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리기라도 한 듯.

3월 22일 새벽 4시, 나도 모르게 눈을 떴어요. 첫째랑 둘째 딸래미들은 잠꼬대처럼 “엄마, 잘 다녀오세요”하고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네요. 아직 심한 장염을 앓고 있는 막둥이 아들 녀석은 마음이 약해질까봐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휙 돌아서서 나와버렸어요.

일주일간 세 아이를 맡기고 떠나기 너무 죄송한 마음에 하얀 봉투에 ‘신사임당’ 그려진 지폐를 몇 장 쑤셔 넣어 어머니 주무시는 머리 맡에 슬며시 놓고 나왔습니다. 집을 나서니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3월22일부터 대만에서 원정투쟁 중인 하이디스지회 최지은 조합원(왼쪽에서 두번째).

부르기만 해도 가슴 저리게 아파오는 우리 엄마. 앞을 못 보는데도 더듬더듬 세 아이를 손수 키우시고, 도시락도 싸서 학교도 보내주셨죠. 철부지 시절에 저는 앞 못 보는 엄마가 정말 부끄러워서 어디에 같이 가자고 하시면 싫다고 소리치며 달아나기도 했죠.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다른 엄마들처럼 운동회에 가서 사랑하는 자녀와 달리기도 할 수 없었던 엄마. 엄마는 살아생전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라고 하셨어요. 그 아이들이 어느새 이렇게 자라서 시집도 가고 예쁜 아이도 낳았네요.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으로 기쁘게 살아가시는 엄마는 공장 폐쇄를 앞두고 투쟁하는 저에게 오히려 희망을 갖고 열심히 싸워서 이기라고 용기를 주셨죠. 비록 세상은 어둡지만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다고 엄마가 항상 제게 말씀해주셨죠?

앞 못 보는 엄마가 물려준 ‘긍정의 힘’으로 꼭 이길 겁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서 그런지 저도 긍정의 힘을 조금 이어 받은 것 같아요. 힘들지만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고 불의에 맞서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더 올바르게 자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많이 부족한 엄마지만 투쟁 꼭 이겨서 이 더러운 세상, 절대 물려주지 않을 거예요.

저희가 대만 공항에 내려 처음으로 달려간 곳은 YFY그룹 본사와 ‘호회장’(허쇼우추안 회장) 집이었어요. 호회장 집은 정말 이름처럼 호화로웠어요. ‘저 사람은 하이디스 노동자 377명과 가족들은 차가운 바닥에 내동댕이 쳐놓고 대궐 같은 집에서 잠이 올까’하는 마음에 서러움이 밀려왔습니다.

▲ 최지은 조합원이 대만 노동부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여보. 대만 원정투쟁 가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 서슴지 않고 다녀오라고 말해준 당신. 하이닉스 단지(하이디스가 입주해 있는 공단)에 신설되고 있는 건물로 발령이 나서 하루가 멀다하고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종일 먼지를 들이마셔서 자는 내내 기침을 하느라 잠 못 이루고, 허리 통증 때문에 날마다 찜질을 하며 잠을 청해야 했던 당신이죠.

제가 지금 이렇게 힘차게 싸울 수 있는 이유는 뒤에서 힘껏 밀어주는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결혼해서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지어준 적 없는 무심한 아내지만, 뭐가 그리 예뻐서 이리도 사랑해주는지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원정투쟁 온 뒤로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항상 사진 속 아이들 얼굴의 볼과 입을 만지작거리며 그리워 눈물 짓다가 잠들곤 합니다. 아이들아, 엄마가 많이 많이 사랑해.

그래도 이젠 그만 울어야겠지요. 이곳 대만 땅에서 당당하게 투쟁하고 꼭 호회장을 만나고 돌아갈게요. 그래서 더 이상 대한민국 노동자들이 남의 나라에서 투쟁하는 일이 없도록 승리하겠어요. 그것이 우리 가족들에게도 제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해.

최지은 / 경기지부 하이디스지회 조합원

저작권자 © 금속노동자 ilabo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