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이하 한노보연)는 ‘중대재해 근절과 작업중지권 실현을 위한 당장멈춰팀’(이하 당장멈춰)을 구성해 작업중지권 복원을 위한 실태연구와 이론 축적 등의 사업을 진행한다. 한노보연은 올 하반기 노조 노동안전보건실의 협조를 얻어 금속노조 사업장의 작업중지권 실행 경험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작업중지권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고찰, 작업중지권 복원과 확장에 대한 한노보연 당장멈춰팀의 기획 연재를 열 차례에 걸쳐 싣는다.

<연재 기획>

① 작업중지권이 일상인 현장, 어떻게 활용하고 지켜나고 있는가.

② 노동자의 안녕을 위한 권리 구성

③ 징계 및 손배로 작업중지권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사업장

④ 작업중지권의 법리적 쟁점

⑤ 임금 손실로 직결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⑥ 현행 산업안전보건법 26조 ‘작업중지권’ 의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과제

⑦ ‘위험’이란 무엇인가, ‘급박한 위험’이란 무엇인가.

⑧ 해외의 작업중지권 사례 비교

⑨ 작업중지권의 확장 : 유해위험작업중지권, 작업거부권, 작업거절권, 작업회피권

⑩ 현장의 조직력 강화 측면에서의 작업중지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을 할까? 아니 이 질문에 답하기 이전에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 더러 일부는 안타깝게도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무심하게도 죽지 않아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경우가 아닌 바에야 사는 이유를 때때로 되새길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공민(公民)의 권리와 시민(市民)의 자유를 구성하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공동체에서의 권리 또는 의무, 자유와 투쟁의 명분, 제도와 법은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의문에 답하고 따지면서 형성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은 왜 사는가? 당신은 왜 일을 하는가? 대부분 잘살려고 산다. 잘살려고 일을 한다. 우리가 겪는 온갖 몸부림은 바로 잘살기 위함이다. 잘사는 것은 경제적인 것부터 사회관계, 정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다른 기준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전제는 동일하다. 바로 내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일을 하면서 무엇이건 간에 자연적 변화 보다 빨리 당신의 육체와 정신을 소멸시키거나 퇴화, 소진시킨다면, 이는 잘살아보고자 하는 당신을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삶의 기초적 전제와 희망을 부정당하는 것이다. 안전과 보건의 문제는 당신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묻는 기초적 문제이다. 이윤을 중심으로 편재하는 일터, 자본주의 일터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시공간이다. 때문에 노동자는 더욱 더 ‘내가 왜 사는가? 왜 일하는 가’를 되묻고 존재하기 위해 실현해야 할 기본 권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살펴야 한다.

왜 사는가, 왜 일하는가

‘자연권’이란 말이 있다. 자연권이라 함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가지고 있는 권리. 자기 보존이나 자기 방위의 권리, 자유나 평등의 권리 따위’를 말한다. 예컨대 죽을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어떠한 안전장비 없이 불 속에 뛰어들 것을 강요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 기초적 권리, 즉 존재하고자 하는 자연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노동자를 포함해 인간은 모두 자연권을 가지고 있고, 이를 보장해야 한다. 제대로 존재하지 않으면 무엇이건 간에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모든 권리는 이 자연권을 기초로 한다.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서 자연권의 상태는 어떨까? 안전 수칙 등을 지키지 못하게 해서 발생하는 어처구니 없는 폭발, 추락, 절단, 분쇄 사고 등(대표적인 것이 사례가 공기단축, 하청으로의 위험이전)은 권리 측면에서 어떤 상태를 의미하나. 살기 위해 일이 하는데 ‘자기 보존이나 자기 방위의 권리’마저 박탈당한다면 해당 공동체 또는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노동계에서 주장하는 ‘기업살인법’은 바로 이 기초적인 자연권을 박탈하는 기업에 대한 공동체와 국가의 단죄를 의미한다. 한편 법 구조적으로 보면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아래 산안법)의 작업중지권은 자연권 행사라고 봐야 한다.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위협이 있을 때 이를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행위 또는 권리는 특별한 권한이라 할 수 없다.

노동자의 자연권

노동자에게 위의 자연권만 주어지면 잘 살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자연권은 그야말로 존재를 위한 기초적 권리일 뿐이다. 이것 이상의 진전된 권리를 생각해보자.

현장에서 일을 한다면, 계약서를 썼건 아니건 간에 사용자(기업주)와 노동자는 상호 주요한 권리의무관계를 맺는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노동력 제공의무를, 사용자는 임금 제공의무가 있다. 그런데 이때 사용자는 임금 제공의무 뿐 아니라, 안전배려의무를 동시에 가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상식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 일을 할 것을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강요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때 사용자가 안전배려의무를 다하지 않아 노동자가 피해를 입는다면 이후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손해배상청구는 사후 처방이어서 피해를 방지할 수 없다. 또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충분한 권리행사라 볼 수 없다.

따라서 사전에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노동자의 작업 거부 또는 거절이다. 이것을 ‘작업거절권’이라 흔히들 칭한다. 요약하자면 작업거절권은 사용자가 충분한 의무(안전배려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는 이에 대한 급부(노동력제공)를 제공하지 않을 권리이다.

이는 현재 산안법의 작업중지권과 어떻게 다를까? 법이 규정한 작업중지 및 대피 등은 맥락에 있어 유사성을 가진다. 법상의 작업거부 및 중지는 작업거절권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작업거절권은 산안법이 ‘급박한 위험’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건 간에, 이것 이상의(넓은) 사용자의 안전배려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 이상(넓은)의 거부 권리를 의미한다.

이래야만 비로소 작업거절권의 실익이 발생한다. 이때 노동자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보다 폭넓게 보호할 수 있다. 산안법의 작업중지 조항 역시 이런 태도와 기치를 가지고 접근해야 현장에서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안전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작업을 거절하라

거절권의 한 사례를 살펴보자. 최근 서울시 다산 콜센터가 상담원들에게 통화종료권을 부여했다. 성희롱 또는 고의 악성 민원인의 경우 통화를 종료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통화종료권은 일종의 작업거절권이라 할 수 있다. 정신적,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작업 환경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급박한 위험’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업주가 적어도 법상의 안전조치나 보건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경우 노동자는 작업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현행 산안법 뿐 아니라 민법 등에서 확인하고 확산해야 한다.

외국의 경우 법 규정과 해석의 차이가 있으나, 맥락 상 같은 수준의 입법이나 적용을 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독일민법을 통해 안전배려의무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이에 기반해 노동자의 작업거절권은 폭넓게 지지하고 있다. 미국도 노동법적 차원에서 인정하고 있고, 집단적 거절도 인정한다. (물론 구체적인 기준이 경우에 따라 까다롭기는 하다) 일본은 법원 판결을 통해 일부 인정하고 있다.

▲ 최근 서울시 다산 콜센터가 상담원들에게 통화종료권을 부여했다. 성희롱 또는 고의 악성 민원인의 경우 통화를 종료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통화종료권은 일종의 작업거절권이라 할 수 있다. 정신적,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작업 환경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자료사진>

한편 작업거절권과 더불어 노동자의 인격권 보장도 생각할 수 있다. 노동자의 인격권 보장은 건강한 일터를 구현하는데 있어 중요한 고리다. 일반 계약과 달리 임노동관계에서는 제공하는 노동력과 인격의 분리가 쉽지 않다. 즉 인격과 동반되는 노동력 제공과 사용자의 통제는 불가피하게 노동자의 인격권 침해 가능성을 매우 높게 한다. 이에 대한 대항 권리가 있어야 한다.

인격권 침해는 노동자의 삶을 망치고, 안전과 보건을 위협한다. 특히 인격권은 노동자의 정신건강과 긴밀히 연관된다. 직장 내 성희롱, 집단적 괴롭힘, 인신모욕적 폭언, 프라이버시 침해, 개인정보 무분별한 수집, 양심에 반하는 노동 강요, 건강 및 가정생활의 양립에 반하는 장시간노동의 강요 등은 노동자의 인격권을 위협하는 다양한 사례다.

인격권 보호를 위한 대표적인 노동법 규정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한 ‘직장내 성희롱 예방 및 조치사항’을 들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이정도 인지라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는 인격권 침해를 방지 할 수 없다. 스웨덴이나 핀란드, 프랑스 등은 '직장 내 괴롭힘'을 법으로 정의하고 이를 금지하는 법규를 채택하고 있다.

노동자의 인격을 보호하라

노동법적 차원에서 보면 노동자의 인격권은 사용자의 지시권과 충돌한다. 예컨대 정해진 복장 의무, 양심에 반하는 일 강요 등은 사용자의 지시권과 충돌할 수 있다. 현행법에서 사용자의 노무지휘권, 기업자산의 소유권 및 시설관리권을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노동계약에서 사용자의 구체적인 지시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노동자의 인격권을 사전에 포기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작업거절권과 인격권은 구현해야 마땅하지만 대다수 노동자에게 낯선 것이 사실이다. 앞서 도입부의 질문과 같이 ‘왜 살고, 왜 일하는가’를 고민하면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안녕을 위해서는 이러한 권리가 필연적으로 구성, 보장돼야 함에도 말이다.

노동을 하면 당연히 아프거나, 모욕을 견디거나 또는 자신조차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 일도 감내해야 한다는 인식이 크다. 절제와 굴종을 구분하지 못하고 경제적 압도로 인해 자본의 권리를 무한 확장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강박에 스스로 익숙해져 있다.

정부와 사회는 이것을 공식, 비공식으로 조장하고 지원한다. 한국사회의 경제적 성장과 걸맞지 않는 노동자의 미약한 권리 보장으로 인해 상당수의 노동자는 자연권조차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거절권이니 인격권이니 거론하는 것이 시대에 걸맞지 않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이기에 더욱 권리의 정당성 논리와 명분을 만들고 노동자들의 동의와 사회적 인정을 확대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노동자가 쟁취한 모든 것은 스스로 인정하는 정당성과 권리의식이 전제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본은 자신들의 이해논리를 노동자에게 내면화하려 한다. 자본은 ‘왜 사는 것인지, 왜 일을 하는 것인지’ 근본적 질문을 회피하도록 조작하고 규율한다. 노동자가 현실을 바라보면서 보내는 냉소는 자본이 추구하는 세상의 자양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치고 힘들더라도 보다 적극적 자세로 ‘잘사는’ 노동자의 논리와 권리 구성을 멈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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