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발암물질 대책이 왜 이렇게 열악할까”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는 1년에 발생하는 암 중 직업성 질환으로 인정되는 비율이 0.3%~0.5% 정도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1/10인 0.036% 수준. 2009년 4월 30여명의 양심적 진보적 의사, 환경보건학자, 독성학자들이 이러한 현실을 가만 두고 볼 수 없다며 뜻을 모았다. 2009년 4월 ‘발암물질 감시네트워크’가 발족한 것.

▲ 발암물질정보센터 곽현석 기획실장.
금속노조 발암물질추방 투쟁선포 기자회견이 열린 3일, 발암물질 감시네트워크에서 활동 중인 곽현석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발암물질정보센터 기획실장을 만났다.

곽 실장은 작년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의약품과 베이비파우더에 석면 탈크(Talc)가 함유된 사건을 떠올렸다. 석면은 10~40년의 잠복기를 거쳐 폐결핵이나 폐암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당시 석면이 함유된 베이비파우더에 노출된 아기는 한창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릴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당시 정부는 탈크를 수입한 업체를 쥐 잡듯이 뒤지며 대책마련에 나섰고, 결국 중국산 제품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렸다. 외교 마찰로 번질 수 있는 위험까지 감수하며 정부가 큰 결단을 내린 것 아닐까?

곽 실장은 “탈크와 석면은 암석학적으로 유사한 물질이기 때문에 혼합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산을 금지한다고 안전이 담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는 “외국에서 위험물질이 들어오면 엄격한 성분조사를 해서 통제해야 한다”며 ‘사전예방의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발암물질 정부대책 = 無대책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전 예방을 할 수 있는 제도적 학술적 여건 자체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점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곽 실장은 “프랑스에서는 정부가 화학물질의 위험성을 꾸준히 조사하고, 유해 발암물질의 경우 대체물질을 개발 발굴해 기업이 이를 사용토록 이끌고 있다”고 소개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비슷한 연구들을 하지 않을까? 곽 실장은 “발암물질과 관련된 연구 중 정부가 주도하거나 지원해 나온 연구 결과를 본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민간 기관의 연구는 있지만, 정부가 나서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발암물질과 관련된 우리나라 법제도도 마찬가지다. 곽 실장은 “6, 70년대에 비해 거의 발전된 것이 없다”고 비난했다. “심하게 말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곽 실장이 공개한 2009년 발암물질진단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의 경우 화학물질 또는 이를 사용한 제품을 유통시킬 때 반드시 독성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석유정제산물의 경우 벤젠이나 1-3부타디엔 함유 정보를 제공하게 돼 있으며, 제공하지 않을 경우 무조건 발암성 표시를 하도록 제도적으로 강제한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일일이 성분분석을 하지 않는 한 발암물질 포함여부를 알 수조차 없는 현실이라는 것. 곽 실장은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을 구입할 때 제품 내에 건강을 해칠 수 있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며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은 당연한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국민 권리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다”

곽 실장은 “생산성만을 생각하는 사용자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해외에는 발암물질을 대체해 사용할 수 있는 물질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캐나다의 경우 석유정제산물 대신 식물성 기름을 사용해 발암물질을 대체한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곽 실장은 “기업들이 보다 저렴하고 효과 좋은 물질만 찾다 보니 대체물질이 나와 있음에도 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같은 기업과 정부의 태도에 맞서 노동자들은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곽 실장은 올해 금속노조에서 본격적으로 벌이게 될 발암물질추방투쟁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발암물질에 가장 심각하게 노출되고 있는 금속노동자들이 나서준다면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문제는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성원 전체의 문제이기에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지적이다. 곽 실장은 “노동조합이 발암물질 문제 해결을 위해 선도적으로 나선다는 것 자체로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해외에서는 건강권 문제가 노동조합의 사회적 투쟁에 핵심 의제로 제기되는 경우가 많다”며 “당장은 먹고 사는 문제, 고용의 문제에 급급하지만 우리나라도 향후에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건강권 문제…사회 변화의 중요한 동력"

곽 실장은 수년간 노동자들과 함께 발암물질 대응 사업을 벌이며 아쉬웠던 점도 토로했다.
“발암물질 문제, 건강권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많이 실망도 했었습니다. 심지어 이 운동을 계속 해야 할지 후회한 순간도 있었어요”
곽 실장은 “어떻게든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면서 “이 문제가 노동자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로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발암물질이 노동자가 입고 있는 옷과 몸을 통해 가족들에게 옮겨갈 뿐 아니라, 하수구와 굴뚝, 그리고 제품 자체로 새어 나가 결국 가족들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특히 발암물질은 수년 수십년간 모르고 있다가 발견돼 정확한 원인을 찾기 힘들 뿐, 실은 우리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질병을 유발한다는 데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담배 몇 대 줄이면 되는 문제라고 안일하게 생각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곽 실장은 금속노조의 발암물질추방투쟁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신이 취급하는 물질에 대해 항상 의심하십시오. 조금이라도 의심된다면 물질안의 성분이 무엇인지 찾아보시고, 도움을 요청하세요. 저희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곽 실장이 소속된 발암물질정보센터에는 기존 학자 위주의 전문가들 외에도 최근 변호사와 노무사까지 결합해 노동자들의 투쟁 지원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곽 실장이 소속된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발암물질정보센터와 발암물질감시네트워크는 지난달 25일 ‘발암물질목록1.0’을 발표했다. 현재 총 495종의 발암물질이 목록에 포함돼 있으며 노동계와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이를 계속 발전시킬 계획이다. 센터는 올해 금속노조의 발암물질 추방투쟁과 더불어 운동을 더욱 확대시킬 예정이다. 화장품, 세제, 장난감 등 시민환경영역에서도 소비자 가이드 형태의 정보를 제공해 국민들이 유해 물질 정보를 확인하고 제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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